울대를 따라 올라온 열기가 6부 능선을 넘고 있었다. 휴대폰을 스피커 모드로 바꾸고 냉동실을 열었다. 얼음물을 들이켜도 서운하다 못해 억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왜 이 나이를 먹도록 싫다는 소리 한마디를 하지 못하나. 맴돌던 기운이 옮겨갔는지 눈꺼풀 안쪽이 뜨끈했다. 스피커에서 분출되는 음성을 지켜보며 목젖을 조이는 원망을 삼켰다. 할 수 없죠. 제가 갈게요. 타오르는 속내를 입술은 또 외면하고 있었다.
올 초였다. 시누 남편의 1주기에 온 사람치고 형님은 혼자만 봄이었다. 병마와 싸우는 환자라기엔 걸음걸이가 지나치게 경쾌했고 제를 지내는 절집 가득히 낯선 분내를 풍겼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인가. 예상하지 못한 등장에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슨 억하심정이냐며 밀린 설움이 몰려오는데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식사 자리에서 시고모님은 형님 숟가락부터 챙겼다. 작은어머니도 형님 상에 먼저 음식을 내었다. 다들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데 정작 당사자는 몇 술 뜨다 말고 일어섰다. 집에 가서 시어머니 얼굴이라도 보고 가라는 말을,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무정한 뒷모습에 나만 어쩔 줄 몰랐다.
어머님의 효용가치가 떨어진 건 사오 년 전부터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굳건하던 어머니는 여든을 넘기기 무섭게 사위었다. 쓸모를 다한 숯덩이나 다름없었다. 파킨슨에 치매까지 겹쳐 거동이 어려워지자, 종가의 법도라며 재화 권리를 주장하던 큰집이 봉양의 형평을 제기했다. 세태를 따라야 한다는 장손의 말에 친지들은 어쩌겠냐는 소리만 되뇄다. 상실을 두려워하는 남편 앞에서 시시비비를 따질 순 없었다. 그때 눈치채야 했다. 다들 큰며느리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인데 나만 끈을 붙들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반찬이 넉넉해서 다행이다. 찬거리를 챙긴 뒤 어머님이 계시는 인제에 다녀오겠다고 가족 메시지 방에 주의 사항을 남겼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으나 받지 않았다. 하지 말아야 할 단어를 뱉을 것만 같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 에어컨 송풍구를 눈 쪽으로 돌렸다. 냉기를 쐬어도 눈앞이 뿌옜다. 삿된 생각을 덮으려 라디오 볼륨을 높였지만 미세한 틈 사이로 울분과 체념이 교대로 파고들었다. 홍천을 지나 철정에 다다를 무렵 더 이상 쏟아지는 문장을 진압하기 어려웠다.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굽이굽이 길을 돌아 내촌면 물걸리 사지에 도착했다. 오래전부터 실물을 확인하고 싶었던 너른 절터는 지세로 보아 융성했을 시간이 짐작되었다. 허나 통일신라시대 보물이 다섯 점이나 출토되었다는 명성과 달리 전각 하나, 석탑 하나뿐이었다. 폐사지치고는 정갈해도 적막함을 숨길 수 없었다. 탑을 돌았다. 오래전 외던 불경을 읊조리려 했지만 울화 가득한 심중에 떠오를 리 만무였다. 뜨거운 햇살 아래 땀이 홍수 같은데 마음은 그대로였다. 왜 하필 나인가. 나도 한번 멋대로 살아보자고 떠난 길이다. 경로를 벗어나도 물음표는 채워지지 않았다.
부처님을 뵈면 허한 마음이 메워질까 보호각을 열었다. 여래 부처님과 비로자나불, 대좌와 광배가 모여 있었다. 일반적인 비로자나불과 반대로 잡은 손 모양이 9세기 불상 특징을 완연히 드러냈고, 가릉빈가를 비롯해 연꽃과 사자, 넝쿨문, 향로문, 불꽃문, 팔부신장까지 가히 보물다웠다. 유물을 살피는 사이 흐린 눈이 맑아진 것 같았다. 천 년 전 석공의 수수께끼를 푸는 동안 주렁주렁한 분노도 말끔해졌다. 진짜 기도를 올릴 때였다.
손을 모으고 바라본 부처님은 얼굴 마모가 심했다. 세월에 풍화되었다기에는 눈, 코, 입술 자리만 유난했다. 두 불상 모두 표정이 없었다. 치매로 인해 희노애락을 잃은 노모가 떠올랐다. 처음 뵙던 날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만면에 웃음을 띠셨다. 하얀 피부에 불그레한 입술, 가지런한 치아가 보기 좋았다. 지금은 눈동자가 텅 비었다. 웃음은 언제 사라진 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전각에서 길 잃은 아이처럼 발을 버둥거렸다. 왜 늙으셨어요? 이젠 왜 웃지 않으시나요? 나는 어쩌라고, 아범은 어떡하라고.
흐르도록 눈물을 두었다. 부모 공양은 당연지사인데 영악하지 못해 뒤집어썼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좋은 시절은 독점하더니 마지막을 떠넘기는 큰집이 미웠고 수수방관하는 집안 어른들한테도 섭섭함을 느꼈다. 땀과 눈물, 콧물로 범벅되었을 때 목이 말랐다.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거리는데 불현듯 몇 시인지 궁금했다. 해는 중천을 넘긴 지 오래. 평생 큰며느리한테 아침밥 한 번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양반이 아니던가. 아버님 살아계실 때는 꼭 시간밥을 드셨는데 그도 깨진 지 오래다.
가속 페달을 밟았다. 달리는 사이 어머님이 즐기던 노래가 나왔다. 아버님은 아내가 부르는 노래를 좋아하셨다. 일요일이면 전국노래자랑을 틀어놓고 내외 나란히 지르박과 차차차를 돌렸다. 마을 회관에서 ‘보석 같은 친구’라는 곡을 배운 날, 어머님은 남편도, 돈도, 다른 자식보다도 막내며느리인 내가 제일 좋다고 노래하셨다. 나도 좋았다. 호랑이처럼 무서운 친정 부모와 달리 어떤 실수도 감싸주는 따스한 햇발이었다. 어머님 사랑이야말로 무조건, 무조건인데, 그런 분을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다니.
천 년 전 물걸리의 영화처럼 노모가 사라진다. 거죽만 남았고 그마저 곧 스러질 거다. 오늘 저지른 일탈은 혼자 간직하기로 맘먹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는 게 낫다. 묵언의 대가로 어른의 여생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이제야 애가 탄다. 얼른 가서 좋아하시는 배춧국부터 끓여야지. 식사가 끝난 뒤에는 목욕을 시켜드리고 오랜만에 붉은 연지를 발라 드리리. 좋아하는 트로트를 들려드리면 가락이라도 흥얼거리실 테지. 입술을 타고 흐르던 당신의 노래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