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이애미에 살고 있는 우리 딸과 외손자가 한 달여 함께 지내다 며칠 전 자기 집으로 갔다. 헤어지는 게 당연한데도 울고 싶었다. 외손자가 고등학교 졸업식 끝나자마자 그날로 날아왔단다. 외손녀도 작년엔 같이 와서 제주도 여행도 하며 보람있게 지냈는데, 올해는 대학교 연구실에서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하느라 오지 못했다. 외손자는 이번에 미국 한인회가 기획하고 대한민국이 지원하는 모국 방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2세 대학생 형, 누나들과 일주일간 서울과 경주에서 한국을 배웠다. 덕분에 한 달의 시간이 금방 갔다.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한국말을 능숙하게 잘한다. 혼자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가서 미국에서 온 친구도 만나고 새로 사귄 형들도 만나느라 바빴다. 10년 전 겨울에 우리 부부는 큰맘 먹고 한 달 동안 미국에 사는 딸네 집에 갔었다. 마이애미의 겨울은 우리나라의 초가을 수준이다. 딸은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는 오누이끼리도 한국말만 하라고 지시했다. 사위가 기획하고 안내하는 대로 여행을 했다. 10일 동안은 미국 남부에서 가 볼만한 곳을 구경했다. 바닷가에 대리석으로 세워진 웅장한 옛날 귀족의 성, 비즈카야에 갔었다. 구경을 다 하고 초등학교 5학년 외손녀가 할아버지가 주신 용돈 100달러로 음료수를 사겠다고 했다. 성에 있는 카페에서 음료수를 주문하고 100달러를 냈더니 여자 점원이 어린아이가 큰돈을 내니까 당황해서 거스름돈을 더 내주었다. 외손녀는 돈을 더 주셨다고 돌려주었다. 계산을 빨리하는 아이에게 또 한 번 놀라면서 고마워했다.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점원이 정성껏 따라주는 차를 우아하게 마셨다. 외손녀가 돈 쓰는 법을 잘 아네! 유명한 조각 공원, 미술관, 마이애미 바닷가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생선구이도 먹어보고, 하하하! 식당에서 서비스로 생선을 발려주겠다고 하는데도 남편은 괜찮다고 자기가 생선을 뼈까지 깨끗이 먹어 치우는 걸 보고 식당 직원이 놀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마이애미 바닷가도 걸어 보고, 바다 위로 끝없이 펼쳐진 다리 위를 지나 미국의 땅끝마을 키웨스트도 가 보았다. 그곳엔 특이하게 수탉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노인과 바다’를 지은 헤밍웨이가 살던 집도 가 보았다. 10일 동안은 딸네 식구와 남미로 여행을 떠났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브에노스아이레스에 저녁때 도착했다. 호텔로 걸어가는데 초등학교 3학년짜리 외손자가 말했다. “브에노스아이레스가 왜 이리 탁해?” 내가 딸한테 물었다. “브에노스아이레스가 무슨 뜻인데?” “으응, 맑은 공기라는 뜻이야.” 대도시라 그런지 정말 공기가 탁했다. ‘마이애미야말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지. 어린 것이 제법이네’ 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둘러보았다. 광장엔 조각상도 많이 있었고 높이 솟아있는 오벨리스크도 보였다. 오페라 하우스도 들어가 이층 오른쪽에 있는 왕족이 앉는 자리에도 앉아 보았다. 어느 초등학교는 옛날 궁궐이라고 했다. 아르헨티나 쪽에서 ‘이과수폭포’를 보았다. 이과수폭포는 두 나라에 걸쳐 흐르는 세계 최대의 폭포다. 물이 세차게 흘러내리고 주변엔 나무숲이 우거져 있었다. 관광객이 무척 많았다. 아르헨티나는 사람들 걷는 방향이 아직도 왼쪽이었다. 아르헨티나에 붙어있는 브라질로 버스를 타고 갔다. 국경에서 여권 검사를 했다. 바로 ‘이과수폭포’ 안에 있는 벨몽드 호텔로 갔다. 이 호텔에서 사흘간 머무르면서 아침마다 이과수폭포 산책을 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해서 내다보면 버스를 타고 온 관광객들이 구경하고 떠나곤 했다. 호텔에는 항상 새 물이 공급되는 커다란 수영장이 있는데 우리 외손주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우리 어른들이 한가로이 차를 마시며 바라보고. 옆에서는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악사들이 있어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과수폭포는 브라질 쪽에서 보는 것이 더 웅장하고 물보라도 멋있다. 산책길에는 별로 예쁘지 않지만 불편하게 하지 않는 라쿤이란 동물이 가족을 이끌고 돌아다닌다. 폭포를 따라 산책하는 길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God is always greater than all of our troulbles!’ 직역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문제보다 언제나 크시다!’고 의역하면 우리의 모든 노력보다 하나님은 언제나 위대하시다! 라는 뜻이라고 남편이 해석해 주었다. 이과수폭포의 자연경관을 보면서 ‘그래, 맞아. 그렇고말고.’하고 동의하게 된다. 호텔 마당엔 쟈스민꽃이 만발하고 밤이면 화단에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화려하게 반짝인다. 낮에는 폭포에서 가까운 새 공원을 갔다. 여러 종류의 새가 많았는데 특히 투칸이란 새가 부리가 특이하게 생겨서 조각품을 사서 외손자에게 선물했다. 비행기를 타고 페루의 수도 리마로 갔다. 한국인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호텔에서 하루 머물고 그사이 사위는 사업차 사람도 만나고 마추픽추로 가기 위해 쿠스코로 향했다. 쿠스코의 거리는 골목이 좁고 겉모습은 우중충 하지만 안에 들어가면 화려하다. 부자가 아닌 척하느라 그런단다. 광장에 나가보았는데 쿠스코 거리 풍경을 그려 파는 사람이 있어 한 장 샀다. 시청 앞에 마야문명의 옷을 입은 원주민 여럿이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 지나가는 우리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오늘 시청에서 선물을 준다고 해서 기다린다고 했다. ‘시청 안에서 기다리게 하지 왜 길바닥에서 기다리게 하나?’ 그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해발3400 m 라 그런지 고산지대를 가기 위해 미리 일주일 전부터 카모마일 차를 마셨는데도 저녁에 호텔에서 자려고 하는데 어지러워서 그냥 쓰러져 잤다. 이튿날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로 갔다. 기차역에서 한국인 50대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는 걸어서 마추픽추까지 간다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었다. 기차는 아주 훌륭했다. 먹을 것도 주고 공연도 보여 주었다. 가는 중에 비가 내렸다. 아까 만났던 배낭 멘 멋진 여성이 걱정되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을 올라 드디어 마추픽추에 도달했다. 우리는 마추픽추 안에 있는 호텔에 들어갔다. 방마다 조그만 야외 수영장이 있고 벽난로가 있어 운치가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호텔 정원에는 벌새들이 윙윙거렸다. 식사 후 휴게실에선 차를 마시며 세 사람이 연주하는 팬플륫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 목동의 피리 소리처럼 아름다웠다. 낮에는 마추픽추 관광을 하는데 우리 가족에게 한 명의 가이드가 같이 다니며 설명을 해 주었다. 서툰 영어로 설명하니까 우리 딸이 스페인어로 해도 된다고 하니 좋아서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페루는 스페인에 정복당했던 과거가 있다. 우리 외손주들은 1학년부터 수학 시간에만 스페인어로 공부를 해서 그런지 잘 알아듣고 질문도 했다. 우리 딸이 통역을 잘해주니 불편함이 없었다. 마추픽추는 어마어마하게 큰 돌들을 정교하게 짜맞추어 담을 쌓고 집을 지어 그 높은 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단다. 참으로 대단하다. 그 산에는 라마라는 동물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외손주들은 동물을 좋아해서 사진도 같이 찍었다. 이튿날엔 마추픽추 아래에 있는 시장에 가서 팬플륫도 사고 알파카 털 방석도 샀다. 알파카 목도리도 샀는데 포근해서 겨울마다 잘 쓰고 있다. 미국 마이애미로 돌아와 손주들 학교에 가서 공개수업도 구경했다. 학부형들이 먹을 것을 한 가지씩 가지고 왔는데 그 중엔 아이를 입양한 게이 아빠도 있다고 했다. 슬쩍 보니 전혀 불편해하지 않고 부형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교 시간이 되면 우리 딸과 아이들을 데리러 간다. 학부형들은 온 차례대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교문에서 교감 선생님은 벌써 우리 딸만 보고도 손주 이름을 크게 부른다. 학생 이름이 호명되면 교문 안에 있다가 나와서 차에 올라타는데, 교감은 전교생 부모 얼굴과 아이들 이름을 다 외운다고 했다. 참으로 훌륭하다. 미국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느라 온통 집 마당을 아름답게 꾸며서 저녁에 내다보면 집집마다 휘황찬란하다. 남편은 손주와 단지 내에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자주 했다. 산책하다가 떨어져 있는 도토리를 주워다 묵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우리나라 도토리처럼 가루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올해도 딸과 손주를 데리고 남편 모신 안식원을 찾았다. 내가 지은 시를 붙여 놓았는데 딸 보고 읽어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딸은 아들보고 읽으라고 했다. 손주는 몇 줄 읽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너무 미안해서 셋이는 끌어안았다. 나는 나만 슬픈 줄 알았고 딸은 자기만 슬픈 줄 알았다. 외손자에게 너무 미안했다.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살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대신 사과 했다. 지난해 손주들이 왔을 때도 손주들은 할아버지와 갔던 곳에 가서 할아버지의 자취를 찾아보려 애쓰고 눈물짓고, 함께 먹었던 음식들을 모두 먹어보며 할아버지를 그리워했는데 아직도 엊그제처럼 슬프구나! 참으로 미안하다! 모든 일들이 엊그제 있던 일 같은데, 할아버지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외손주의 흐느끼는 소리만 남은 오늘이 되었구나.

안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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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금희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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