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3일 드디어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5월 초 중산리에 숙소를 예약하고 등반하려 했으나 비로 인해 6월초로 연기하고, 6월초에도 또 비가 와서 두 주 후인 이번에 세 번째에야 겨우 등산을 하게 되었다. 천왕봉은 나 같은 범인에게는 함부로 등정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중학교 동창인 우리 셋이 지금까지 다녀온 산 중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으로 그동안 벼르고 별러 도전하였기에 나름 의미가 많은 등산이었다.
하긴 지리산이 어떤 산인가? 일단 규모가 엄청나게 큰 산이다. 지리산은 남한 내륙의 최고봉으로 1967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경남의 하동, 함양,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483㎢의 면적을 지닌 산이다. 오늘 우리 일행이 오른 지리산 최고봉은 1,915m의 천왕봉이고, 그외에도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 등 수많은 봉우리를 거느린 웅대한 산이다.
3~40년 전 겨울에 노고단을 차로 오른 적이 있었고, 남쪽으로 가는 길에 지리산 주변을 차로만 지나친 적은 여러 번 있었으나 정작 지리산에는 발을 제대로 딛지 않아 지리산은 내게 늘 가보고 싶은 궁금한 산이었다. 그리고 지리산 하면 내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학자 남명 조식이 쓴 시조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세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이 시조에서 두류산이 지리산이라며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도 정작 나는 가 보지 못한 지리산을 얘기했으니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이 시조에서 얻은 이미지가 지리산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되었었다.
이 시조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기대와 설렘으로 등반 하루 전 춘천을 떠나 제천의 악어봉, 영동의 월류봉을 구경하고 산청의 중산리 탐방지원센터 부근에서 민박을 했다.
다음날 우리 일행 셋은 아침 6시 20분경 등반을 시작했다. 어제 내리던 비가 그치긴 했으나 날은 개지 않고 구름이 잔뜩 끼어 동서남북도 분간하기 어렵고 어디가 정상부인지 모르겠다.
출발 후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자 바로 등산로 입구다. 등산 안내도를 보니 천왕봉 올라가는 길이 5.4km나 된다. 같은 길을 다시 내려오는 것보다는 정상에서 상황을 보아 장터목휴게소로 돌아 내려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며 등반을 시작했다. 등산을 시작한 초입부터 바닥에 돌이 깔린 너덜길이 계속된다. 다행히 나름 정리된 등산로라 큰 불편은 없으나 이런 길을 하루 종일 걸으면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갈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숲속으로 들어서니 숲이 우거져 시야가 좁고, 구름이 잔뜩 끼어 더욱 사방을 분간할 수 없다. 그래서 그저 묵묵히 앞으로 앞으로 기어 올라갈 뿐이다. 가끔씩 나타나는 이정표 팻말이 반갑다. 이런 이정표가 없다면 등산길이 얼마나 답답할까? 내가 얼마나 왔는지,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고, 또 갈림길에서 엉뚱한 길로 가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잘 해 주니 반가운 것이다. 이정표가 있는 곳마다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오늘의 등정을 가늠하며 사진을 찍고 올라갔다.
칼바위란 곳을 지났다. 지리산을 등산할 때 갈림길이 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한참 더 올라가다 보니 뒤에서 빠르게 올라오는 주황색을 입은 등산객이 하나 있다. 배낭도 없이 뒷주머니에 검은 비닐로 핸드폰을 싼 것만 있는 홀몸이다. 어찌나 빠르게 오르는지 신기해서 잠시 말을 붙였다. 지리산 날다람쥐란다. 2,500번 넘게 천왕봉을 다녀와서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출연했고 ‘생생정보통’에도 출연했단다. 그 사람을 올려 보내고 유튜브를 검색해 보니 정말 지리산 날다람쥐란 분이 있다. 김요섭이란 분이다.
한참 후 우리는 계속 오르는데 이분은 벌써 내려온다. 내려 오는 분을 붙들고 이름까지 대니 맞단다. 유명 인사이기에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리고 잠시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름에 크리스천 냄새가 나서 물어보니 이분도 장로란다. 우리 일행도 장로, 선교사, 권사가 있어 잠시 대화를 더 나누다 헤어졌다. 2030년까지 천왕봉 3천 번을 등정할 계획이란다. 천왕봉까지 오르는 5.4km를 왕복으로 2시간 18분에 완주한 것이 최고 기록이란다. 우리는 10시간을 걸려서 다녀왔건만 대단한 체력이다.
계속되는 오르막길 구름 속과 숲속을 동시에 걷는다. 주변을 살펴보니 참나무가 낙엽송과 같이 곧고 가늘게 뻗어 있는 곳들이 많다. 강원도에서는 이렇게 가늘고 긴 참나무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곳은 숲이 울창해서 그런가 보다. 지리산만 하더라도 내가 사는 강원도와는 위도 차가 있어 식생이 좀 다르다. 강원도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도 많다. 물론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래 덩굴도 많고, 산 목련도 많다. 지리산은 높은 곳이라 산목련은 지금이 한창이다. 반가운 마음에 목련꽃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는데 비를 맞고 난 뒤여서일까 향기가 별로 없다. 원래 산목련은 하얀 꽃받침 속에 빨간 색시가 들어 앉은 모양이고, 향기는 짙게 분을 바른 여인의 향기와 같은 꽃인데 향기가 적어 잠시 아쉬웠다.
로타리 대피소에 이르니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올라온다. 우리도 버스를 탔으면 지금 이시간에 이곳에 도착했을 텐데 1시간 반이나 먼저 출발했음에도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과 같은 곳에 있다니? 3.4km를 힘겹게 걸어온 것을 아쉽다고 해야 할지? 그렇지만 버스에서 내린 다음 여기까지 얼마 되지 않은 길을 올라온 여자 등산객 한 분은 몹시 힘겨워한다. 저 상태에서 과연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을 잠시 해 본다.
좀더 올라가니 법계사가 나온다. 거기서 물을 보충했는데, 날이 흐린데다 그리 덥지 않아 2시간 남짓 걸었음에도 마신 물이 얼마 되지 않는다. 비 온 뒤라 골짜기 물을 마실 곳도 많으니 물 걱정 말라던 숙소 주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남은 물을 버리고 다시 병에 새 물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10시간 넘게 걸었음에도 마신 물이 작은 물병 3개도 못 되는 것 같다.
해발 고도가 1,400m를 넘는 법계사를 지나니 식생의 변화도 눈에 띈다. 바람도 많이 불며 제법 춥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 1,400m가 넘는 산은 많지 않다. 그런데 아직도 500m는 더 올라가야 한다. 어떤 산은 5~600m도 험하고 어려운데 아직도 큰 산 하나를 더 올라야 하는 먼 산길이다. 그래도 각오하고 온 길이라 꾸준히 오르고 또 오르면 정상에 오를 것이란 생각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사방이 구름이라 뵈는 게 없으니 오르는데 마음을 빼앗는 것이 없어 오히려 오르는 일에만 더 열심을 내게 되니 이것도 괜찮아 보인다.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정상의 분위기를 물으니 잔뜩 흐려 곰탕이라고 한다. 곰탕이라, 재미있는 비유다. 정상에 올랐을 때 사방이 온통 구름이어서 뵈는 게 없다면 얼마나 실망일까를 걱정하며 오르는데, 그 예측이 맞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점점 강해진다.
얼마쯤 올랐을까? 그간 오른 시간을 재 보니 5시간이 거의 다 돼 간다. 멀지 않은 앞에 구름 속에 봉우리 셋이 보인다. 저기가 정상 같다. 긴 계단을 오르니 정말 드디어 정상이다.
정상에 사람이 많진 않았으나 그래도 정상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몇 순번 기다려야 할 정도는 되었다. 바람이 엄청나게 세서 꽤 춥고 모자도 계속 벗겨진다. 우아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표지석 앞뒤로 독사진, 단체 사진 등을 골고루 찍고 나중에 편집을 위해 표지석만도 따로 사진을 찍었다. 날씨로 인해 정상 위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은 길게 허락되지 않았다.
사진을 찍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구름뿐 내가 발을 디딘 정상 부근만 조금 보이고 사방은 구름 속이다. 정상에서 오만하게 사방을 굽어보고 싶은 욕심을 하늘이 알았기 때문일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서 2~30여 미터쯤 되는 곳으로 내려오니 바람도 약한 좀 평평한 곳이 있는데, 지리산에 대한 안내판도 4개가 있다. 그 중 지리산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두류산, 방장산에 대한 소개도 있다. 정오가 거의 다 되었으나 춥고 바람이 세서 정상 부근에서는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좀더 하산하다가 먹기로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올라온 길을 그대로 다시 내려가는 것은 넓고 큰 지리산의 지극히 일부만 보는 것 같아 하산길은 올라온 길과 달리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제석봉과 장터목휴게소, 유암폭포 있는 쪽으로 길을 잡았다. 올라온 길보다는 1.7km 먼 길이다. 그러다 보니 하산 시간도 등산 시간과 같이 5시간 정도로 비슷했다.
정상부 조금 아래 바람이 적은 우묵한 곳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다시 하산을 시작했다. 제석봉 부근에 오니 구상나무 고사목이 구름 속에 신비한 자태로 서 있다. 주변의 나무와 풀들도 구름 속에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좀더 머물고 감상하고 싶으나, 갈 길도 멀고 날씨도 춥고 시야도 지극히 제한되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계속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너덜길과 가파른 계단들, 통천문 등을 거쳐 장터목 휴게소를 지나는데 급경사가 여러 곳 있어 고도를 급격하게 낮춘다. 내려올수록 숲이 우거지고 나무들도 정상 부근과는 달리 점점 커지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등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고도에 따라, 위도에 따라 식생의 변화를 확연하게 느끼게 해 주는 산들이 있는데 이런 산들은 대개 높은 산들이다.
내려오는 길에 지난 곳들은 통천문, 장터목대피소, 유암폭포, 칼바위 등인데 정상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 1.7km이고, 장터목 대피소에서 칼바위까지가 4km 정도 되는데 지루하고 길었다. 칼바위까지 오니 아까 오를 때 지났던 곳이라 반갑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남을 거리가 1.3km란다. 다 왔다 싶으면서도 지쳐서 무릎이 무거운 체중을 감당하느라 아프다는 신호를 계속 보낸다. 1.3km가 꽤 길게 느껴진다. 이쯤 되면 다리에서 쥐가 날 뻔한데 다행이 등산을 시작할 때 마그네슘을 마셔 그런지 피곤하긴 하지만 쥐는 나지 않아 좋았다. 게다가 등산 스틱이 얼마나 몸에 유익한지를 이번에 또 다시 실감게 되었다.
10시간 넘게 걸려 처음 출발한 곳으로 오니 몸음 피곤하지만 성취감으로 가슴이 뿌듯하다. 일찍이 휴정 대사는 ‘지리산은 웅장하나 화려하지 않고, 금강산은 화려하나 웅장하지 않고, 묘향산은 웅장하고도 화려하다’ 했다. 웅장한 지리산은 주변만 돌았지 직접 올라 보지 못해 늘 궁금하면서도 오르고 싶은 산이었는데, 이렇게 천왕봉을 다녀오게 되니 소원 성취 하나 한 것 같은 기분이다. 지리산 정상에 오르고 싶은 사모하는 마음과, 높은 산을 오랜 시간이 걸려야 다녀올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몸과 마음을 단단히 하고 왔더니 잘 다녀오긴 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그 웅장함을 보지 못하고 구름 속에서만 놀다 온 것 같아 아쉬움도 한편 크다. 지리산에 다녀왔으면서도 지리산을 보지 못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의 아이러니다. 그리고 조식의 시조에서 얻은 이미지를 떠 올릴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를 늘 궁금해 했는데 그 시조의 이미지는 전혀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한편으론 언제 다시 지리산에 오를지 모르지만 이런 아쉬움이 지리산에 대한 신비감을 계속 간직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남들은 2박 3일에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종주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새벽에 올라가 정상에서 아침 일출을 보고, 운해를 감상한다고 하는데, 기껏 하루만에 정상을 다녀오고 뭔가 큰일 한 것 같이 자랑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하긴 오후 늦게 우리가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올라가는 사람이 몇이 있어 물어보니 일박하며 별도 보고 아침 일출도 보려고 일부러 늦게 올라간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지리산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리라.
한라산을 물론 지리산까지 등반했으니 이제 다른 산은 쉽지 않을까 자위해 본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중 이번이 65번째였다. 이제 나머지 산들은 1,400m 이상 2군데, 1,000m 이상은 7~8 군데밖에 없어 어떤 산을 간다 해도 크게 걱정이 안 된다. 지금까지 다녀온 산 중에서 힘들었다고 생각되는 산은 오히려 지리산보다 낮은 설악산, 월악산, 두타산 등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들 산은 사전 조사나 마음의 준비가 지리산보다 덜 된 상태에서 다녀왔기 때문에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부이지만 웅장한 지리산도 보았고, 15년 전쯤엔 화려한 금강산도 다녀왔으니 이제 이 둘을 다 갖춘 묘향산도 가 보고 싶은데 과연 죽기 전에 이게 가능할까? 이제 집에 가면 아직 오르지 못한 나머지 산들을 언제 어디부터 가 볼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푹 쉬고 싶다.
지리산을 다녀오며 산의 첫 글자를 이용하여 시조로 느낌을 정리해 본다.
지리산은 영산인가 날씨로 길 막더니
이렇게 세 번째야 등반을 허락받다.
산 중에 산다운 산이니 다른 산은 쉽겠네.
위의 내용을 주고 AI에게도 시조를 써 달랬더니 이렇게 써 준다.
지척을 분간 못 할 짙은 구름 헤치면서
리본 맨 이정표에 고단한 몸 의지하네
산마루 거센 바람도 그 웅장함 못 덮네
첫 글자를 이용하지 말고 그냥 시조로 써 달랬더니 또 이렇게 써 준다.
세 번을 벼르고서 구름 속을 오르니
천왕봉 짙은 안개 세속 시름 덮어주네
가려진 웅장한 자태 가슴 깊이 담노라
제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