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만나러 가려고 운동화 끈을 묶는다. 혼자 산을 찾는 버릇은 여전하다. 눈이 밝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무섭다고 한다. 그 반대인 나는 사람을 좋아하며 믿고 함께 흐름을 탄다. 앞선 이의 발꿈치를 보며 보폭을 고르고 스치는 이의 행색과 내음으로 일상을 읽는다.
정상에 오르면 운동기구가 있다. 여러 가지 운동기구 중에 눈에 뜨이는 것은 훌라후프이다. 오랜 시간 축적된 배가 나왔기 때문이다. 과거의 생활 습관을 좋음으로 유지했었다면 이런 모습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심코 걷다가 어떤 중년의 사내와 어깨가 부딪쳤다. 나는 ‘죄송합니다.’ 하며 별일 아닌 듯이 지나치려 했다. 순간 그의 불타는 눈빛이 섬뜩했다. 그는 말없이 나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등골이 오싹하는 한기를 느꼈다. 더구나 그의 손에는 곤봉 크기만 한 단단한 쇠 스틱을 들고 있었다. 스멀스멀 공포가 몰려왔다. 그런데 왜 그는 이런 호젓한 산길에 쇠 스틱을 들고 다닐까? 혹시 산 짐승들을 위협하려는 도구인지 의문점들이 연이어 꼬리를 물었다. 사이코패스로 인한 사회적 물의가 연상되었다. 가시지 않는 두려움에 조금가다가 뒤돌아보았다. 사내의 모습은 사라졌으나 그가 나를 기억하지 않기를, 다시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원했다. 한편으론 나의 조심성없는 걸음걸이가 예민한 그를 자극하였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일을 겪은 후 나도 등산용 스틱을 가지고 다닌다. 심리적 안정에도 도움이 되지만 언덕과 내리막길에서 중심을 잡아준다. 좀 걸리적거리긴 하지만 이젠 친근한 벗처럼 나를 지키는 제삼자의 역할로 무난하게 함께 걷는다. 혹여나 가는 길에 뱀이 지나가더라도 덜 무서울 것이다. 참 이기적이다. 뱀으로 인해 해를 입은 적도 없는데 미리 나쁨으로 규정짓는다. 자연 속에서 한뿌리인 행운과 불운에 대한 반성하는 시간을 얻는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누군가의 보폭이 애매하다. 점점 궁금증이 증폭된다. 차라리 나를 추월하든지 아니면 느긋하게 속도를 늦추든지 이도 저도 아닌 계속 일정한 속도로 따라온다. 한참을 실랑이하다 코너에서 우연히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검정색 셔츠에 후드모자 사이로 금테 안경이 보였다. 여자다! 일단 마음이 놓이며 안심이 되었다.
시야가 확 트인 계단이 보였다. 지금 이 순간의 전쟁을 벗어나고 싶어서 후다닥 미친 듯 뛰어 내려갔다. 무언가 퉁! 의심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계단 위에서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핸드폰이 떨어졌어요.”
“어머나! 감사합니다.”
앳된 젊은 여성의 부드러운 고운 음성이 조용한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잠시 동안 마음 졸이던 상상이 물거품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음을 느낀다.
까마득한 계단 아래에서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고슬고슬 파마머리의 아낙이 묻는다. 가족을 안고 사는 후덕한 모성애를 품은 얼굴이다.
“산 정상이 아직 멀었나요?”
어떤 대답이 그녀에게 좋을까? 험난한 계단 길, 지름길, 샛길, 오솔길 등….
“직진으로 조금만 올라가시면 됩니다. 힘내세요.”
지친 그녀의 도전에 박수와 불끈하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산 아래 나무 의자에 앉아 하늘에 붙은 불박이장 같은 산을 올려다본다. 자연과 걸으면서 읽는 생각들에 뿌듯하다. 갑자기 수풀 사이에서 “구구구국” 정겨운 산비둘기 소리가 들린다. 반복되는 “구국” 소리는 평화로운 동네 어귀에서 걱정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닮았다. 털고 일어서며 밤나무 숲을 향해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야”
질문 없는 인간적인 대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