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라는 이름을 가진 새가 없듯이 ‘절’이라는 이름을 가진 절도 없다. 일곱 살인 내게 ‘봉의사’는 그냥 이름 없이 절이었다. 세상 궁금한 것이 많은 나는 외할머니를 따라 그 곳에 갔다. 소양중학교 건너편 ‘사농동’ 집을 출발하여 소양강다리를 건넜다. 산 중턱에 있는 절로 가는 오르막길은 꽤나 힘들었다. 그 가을의 날씨는 맑았고 단풍이 예뻤던 기억이 지금껏 남아있다. 그로 인해 내게 그곳은 언제나 가을동산이다. 작은 키에 소양정이 절처럼 보여 나는 그곳을 지금의 봉의사로 생각하고 지내왔다. 기억의 오류다.
봉의사라는 이름은 1954년에 붙여져 불려오다가 1995년 즈음에 신라시대에서 비롯된 역사성을 띄고 ‘충원사’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정보를 통해 이제야 정확하게 알게 된 절 이름 충원사가 있는 봉의산에 가 보기로 했다. 추억 나들이인 셈이다. 산 주변 근화동 기와집골 추억이 가득하다는 남편과 동행했다. 아파트를 지나 상가 입구의 좁은 길을 올라 차를 세운 절 앞은 눈밭이다. 긴 돌계단을 따라가서 대문을 열자 안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내려오려는데 옆의 암자에서 보살로 보이는 사람이 나왔다. 그는 스님이 아직 안 나오셔서 열쇠가 없다며 미안해했다. 먼저 올라간 남편이 그냥 둘러보러 온 것이라 괜찮다고 했다. 적막감이 공간에 가득했다. 널찍한 그 계단을 좌우로 나눈 철제 안전봉의 위용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겨울이라 인적이 없었다. 4월 초파일에는 계단으로 신도들이 줄지어 올라갈 것이고, 가을이 오면 어느 손녀와 할머니가 법당에 들어 천천히 108배를 올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약수터’로 방향을 잡았다. 그늘진 좁은 길은 하얀 잔설과 낙엽이 섞여있었다. 마치 며칠 전 언니가 건네 준 호박시루떡을 닮은 것 같았다. 따스함 대신 울퉁불퉁 미끄러움뿐이다. 조심하느라 길 오른쪽에 설치된 줄을 잡고 걸어 올랐다. 가파른 길을 돌아 나가자 양지쪽으로 시내 모습이 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달리는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하늘을 채웠다. 빽빽이 주차된 자동차의 몸에서 반사되는 빛이 내 눈을 자극할 때, 전망 좋은 곳에 설치된 의자에 몸을 얹었다.
봉의산은 품이 넓다. 소담하게 자리 지키는 도청과 광채를 발하는 시청, 중앙로의 수많은 건물과 아파트 단지는 물론 소양강까지도 너그럽게 안아주는 듯한 푸근함이 좋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춘천대교 모습은 여기서 봐도 시원하게 보인다. 길쭉하게 뻗은 다리 위에 하얀 원형의 조형물은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 위를 달리는 모든 사람과 그것과 마주하는 고장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 원만함이 춘천의 상징인 듯해서 더 좋다.
갈색 마른 풀잎이 쓰러질 듯 흔들릴 때,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향했다. 오전의 태양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참 밝다. 이 순간, 시선이 멈추는 곳은 굵직한 나무 한 그루였다. 녹색과 옥색 이끼로 덮힌 나무껍데기가 한 편의 유화처럼 보였다. 봄 빛깔로 기분 전환을 하고 오르는 돌계단은 폭이 제법 넓어 보였다. 서너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걸 보니 정상이 가까운 모양이다. 여러 갈래로 올라 온 등산객들이 마지막 단계에는 정상으로 모이기 마련일테이니까.
내려오는 등산객에게 옆길을 내어 주고, 그 시절 신나게 놀았다던 남편의 추억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정상에 도착했다. ‘봉의산 300.3m’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반가웠다. 어릴 적에는 무척 높아 보였던 봉의산이 집 앞의 안마산과 같은 높이였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곧이어 우리는 각각 일곱 살과 열한 살의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표지석에서 셀카 사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춘천의 사방을 둘러보았다. 봉황새가 금빛 찬란한 옷자락 휘감는 모습을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