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삶과 너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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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취미가 등산이다. 취미란 마음의 밭을 가는 일이다.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다. 아무것도 안 하는 휴식과 다르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책을 수집하면 취미다. 하늘을 나는 나비를 보는 건 취미가 아니고, 나비를 잡아 핀을 꼽으면 취미다. 취미가 일거리가 되면 즐거움은 날아간다. ‘돈 받고 하라면 시들해지는 것이 취미’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우리 부부는 사십대에 등산을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등산은 여유 있는 중년들의 운동이라 생각했던 시절이다. 남편이 갑자기 병명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살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졌다. 병원도 좋다는 데는 다 가보았고, 검사도 해 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병명도 모른 채 점점 더 야위어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가다가 잘 아는 지인 한분을 만났다. 남편 때문에 속상한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서울 사는 자기 올케가 우리 남편하고 비슷한 병인데 서울 큰 병원에서 치료받고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 말에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병원으로가 달려가 주치의와 상의했다.

 의사는 보호자가 원하시니 특수 피검사를 해 보자고 했다. 그 때만 해도 특수 피검사는 춘천에서는 하지 못했다. 피를 뽑아 서울 큰 병원으로 보내면 15일쯤 뒤 결과가 나왔다. 피를 뽑아 보내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갔다. 15일 만에 나온 결과는 살 빠지는 갑상선이었다. 지금은 너무 흔한 병인데 사십여 년 전에는 이런 병이 있는 줄도 우리 부부는 몰랐다. 의사는 약도 중요하지만 운동도 같이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실내운동보다는 공기 맑은 산이 좋다고 권했다.

 그 시절에는 막노동을 하는 사람은 주말도 없었다. 직장인들은 일요일 하루밖에 못 쉬고, 일요일 쉬는 직장도 많지 않았다. 우리처럼 서민들은 운동은 사치였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선 무슨 일은 못하겠나. 힘이 들어도 일요일마다 산으로 갔다. 워낙 살이 많이 빠지다 보니 다리에 근육이 없어 처음에는 겨우 산언저리에 앉아있다 오곤 했다. 그때는 목표를 향해 걷는 게 아니라 잠깐이라도 걷는 것 자체가 우리의 목표였다. 힘듦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지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자연의 소리와 그 빛 사이에서 평온을 찾으니 삶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산이 우리를 부르지 않아도 우리가 먼저 산을 찾아다녔다. 자신감이 생기니 겁도 없어졌다. 새벽에 떠나 밤에 돌아오기도 하고, 1,000 고지가 넘는 악산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80년도엔 등산로가 갖춰진 산이 별로 없었다. 등산객들도 많지 않았다. 길을 잘 못 들어 헤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흐벅진 함박눈도 맞아보고,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소나무를 붙잡고 태풍 샤워도 했다. 멀리서 멧돼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두려움은 지금 생각해도 몸이 오싹해진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자연은 계산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랑한 만큼 건강을 무한대로 내어 주었다. 그래서 우리부부는 지금의 삶을 아주 큰 편안함으로 바꾸어 놓았다. 오년 만에 남편은 먹든 약도 끓고 건강을 뒤 찾았다. 水滴泉石(수적천석)이 없었다면 건강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는 기쁨 일위는 건강이다. 제일 소중한 건강은 노력한 만큼만 얻어진다. 건강은 제일 큰 재산을 쌓는 일이다. 세월은 우리 부부도 어쩔 수 없다. 큰 산에서 조금 작은 산으로, 또 그보다 작은 산으로, 자꾸 우리를 내려놓는다. 그래도 이 나이에 작은 산이라도 오를 수 있는 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내어준 가장 큰 선물이다. 그래서 산 입구에 들면 늘 감사기도를 하고 오른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춘천 근교 산에 네 시간쯤 즐겁게 다녀온다. 가끔 몸이 가볍게 느껴지면 옛날에 다니던 높은 산이 그리워 용기를 내 다녀온다.

 남편의 병 때문에 시작한 등산이 지금까지 취미로 이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부부가 뒤늦게 뭔가 해보려면 안 하던 짓이라 어색하기도 하고 취미도 달라 똑같은 취미를 갖기가 쉽지 않다. 나도 솔직히 말해서 산 좋아하는 것만 영감하고 같지 다른 것은 하나도 맞는 게 없다. 그렇지만 지금 이 나이에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어줄 영감이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성공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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