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첫 플루트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 것은 꽤 늦은 시기였다. 오십 대 중반 무렵, 쉴 틈 없이 내 삶을 지탱해 오던 일을 그만두고 잠시 숨을 고르던 때였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공허함이 찾아왔다. 평생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돌보지 못한 몸은 아프다고 신호를 보냈고 마음마저 깊이 지쳐 있었다.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문득 '무얼 좀 배워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오래전부터 가슴 한편에 묻어두었던 '악기를 배워보고 싶다'는 소망이 고개를 들었다. 학창 시절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치였지만, 지금이라도 꼭 이루어보고 싶었다. 수많은 악기 중에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크기가 아담하여 들고 다니기 편하고, 맑고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아름다운 플루트였다. 내 인생의 후반전을 함께할 동반자로 플루트를 정해 놓고 벅찬 가슴을 안고 동네 문화센터에 등록을 마쳤다.
플루트라는 악기는 그 이름부터가 한 줄기 부드러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본래 나무로 만들어져 목관악기로 분류되지만, 오늘날에는 주로 은이나 금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화려하고 세련된 외관을 자랑한다. 악기를 가로로 빗겨 들고 입김을 불어넣어 소리를 내는 방식은 볼수록 매력적이다. 현을 튕기거나 건반을 두드리는 대신, 플루트는 오롯이 사람의 체온이 담긴 숨결 자체가 관을 통과하며 선율로 피어나는 마법 같은 악기다. 투명한 고음부터 따뜻한 저음까지 자유자재로 표현해 내며, 연주자의 내면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는 영혼의 악기라 할 수 있다.
처음 결심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문화센터를 향할 때만 해도, 이 만남이 이렇게 오래도록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기롭게 시작은 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음악에 대한 기초 이론도 부족했고, 악기의 특성상 소리 내기조차 쉽지 않아 차라리 그만둘까 하는 회의감도 수시로 밀려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막막함이 오히려 내 안의 오기를 깨웠다. 이대로 쉽게 포기하기엔 억울하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매달렸다. 그렇게 씨름하던 어느 날, 마침내 탁 트인 맑은 소리가 시원하게 뻗어 나갔을 때의 전율은 잊을 수 없다. 조금씩 예쁜 소리가 나고 음악 이론도 하나둘 이해되어 가면서 연주의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나 혼자만의 연습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작은 연주회 무대에 오르는 경험은 삶의 커다란 활력이자 보람이었다.
그러나 악기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오묘해서, 배워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긴 세월을 함께 했음에도 마음에 드는 고운 소리로 제대로 연주해 내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고 항상 실력이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완벽한 연주에 대한 욕심을 조용히 내려놓기로 했다. 지금 당장 화려한 기교를 뽐내지 못하면 어떠한가. 더듬더듬 악보를 읽어낼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내 숨결로 직접 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저 가슴 벅차고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이토록 오래 플루트를 곁에 둘 수 있었던 이유는, 남들보다 '잘해서'가 아니라 이 악기를 순수하게 '좋아해서'일 것이다.
플루트는 이제 단순한 취미 생활을 넘어, 내 삶의 희로애락을 묵묵히 함께하는 가장 든든하고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마냥 즐겁고 행복할 때보다 오히려 삶의 무게에 짓눌려 견디기 힘들 때,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가 간절히 필요할 때 나는 어김없이 방 한구석의 플루트를 찾았다. 조용히 차가운 은빛 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며 켜켜이 쌓인 슬픔과 외로움을 한 자락의 선율에 실어 보내고 나면, 엉켜있던 마음의 실타래가 조금씩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을 호흡을 통해 고운 소리로 승화시키는 이 과정, 이것이야말로 취미 생활이 주는 진정한 치유와 위안인가 보다. 어느덧 야속한 세월이 흘러, 이 나이에 벌써 나도 인생의 황혼기라 불리는 칠십 대 중반이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플루트 연주가 이 노년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도 무척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악기의 구멍을 정확히 막고 떼기 위해 쉴 새 없이 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소근육 운동이 된다. 또한, 복잡한 악보를 눈으로 쫓으며 리듬을 계산하고 운지법을 생각하는 과정은 뇌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치매 예방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하니, 건강도 챙기고 음악의 즐거움도 누리는 이보다 더 완벽한 노년의 벗이 있을까 싶다.
창밖으로 수많은 계절이 바뀌고 세상이 변해간대도, 나의 이 조용한 플루트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내게 허락된 남은 시간 동안에도, 나는 이 은빛 악기와 다정하게 호흡을 맞추며 꾸준히 연주를 이어가고 싶다. 늦은 나이에 화려한 무대나 엄청난 실력 향상을 욕심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오십 대 중반, 지치고 텅 빈 몸과 마음을 이끌고 '악기 하나쯤 꼭 배워보고 싶다'며 설레는 가슴으로 첫발을 내디뎠던 그 떨리던 첫 마음. 무엇인가를 순수하게 열망하고 도전했던 그 시절의 반짝이던 마음 그대로, 나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플루트 곁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품고 나이 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