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은행에 입행 후 1년가량 지난 1981년 이른 봄 장성지점으로 발령이 났다. “작년 입행자는 벽지로 보내 사회 경험을 배우게 하라”는 경영진의 방침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약혼 중이던 나는 못마땅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버스로 원주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황지역에 내렸다. 비포장의 역광장은 바람에 연탄 가루가 날리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장성으로 가는 버스 차창 밖에는 말로만 듣던 ‘검은 시냇물’이 이어지고 있었다. 춘천을 떠난 지 7시간이 넘게 걸려서야 장성에 도착하였다. 집에서 직장까지 거리도 멀고, 교통편도 여의치 않은 때였지만 부임 초기에는 춘천 집에 자주 다녔는데,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출발하면 밤 9시가 넘곤 하였다. 장성에서 산 돼지고기를 집에 가서 펴보면 비계에 신문지의 검은 활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곤 하었으나 맛은 기가 막혔다.그해 7월 삼척군의 황지읍과 장성읍이 합쳐 태백시로 승격되었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탄광산업 중심도시로 발전하면서 태백시는 ‘개도 만원권을 물고 다닌다는’ 호황이 이어졌다.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는 직원 6천명(협력업체 포함시 8천여 명)으로 우리 지점의 가장 큰 거래처였다. 광업소 담당직원들과는 자주 술자리가 벌어지곤 하였는데, 뱀술을 좋아해서 늘 코가 빨갛던 Y과장의 기상천외한 언행들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당시 온라인은 대도시에만 시행되었기 한 달에 한 번 광업소의 급여일에 맞추어 현금을 한국은행 강릉지점에서 가져오는 것이 우리 지점의 가장 큰 업무 중 하나였다. 당시 광부의 급여는 초임 공무원의 2배 수준으로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갱도 붕괴 등의 사고와 진폐증으로 인한 이직율이 높아 읍내 곳곳에 광부 모집 안내판이 서 있었다. 급여 자금은 매월 약 10억 원 정도였고 상여금이 나오는 달에는 15억 원에 이르렀는데, 1천 원권이 주종이던 시기라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현금을 가지러 강릉으로 가는 날은 지점 전체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40여 년 전, 지금처럼 금융 결제망이나 보안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4톤 트럭과 운전기사를 임차하고, 가스총을 찬 청원경찰을 포함해 지점 직원 3명이 호송 작전하듯 다녀와야 했다. 당시 출납주임이던 내가 현금수송 책임자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빈 트럭으로 출발할 때에는 구불구불하고 험한 산길이 이어지지만 단거리인 35번 국도를 이용해 시간을 단축했고, 막상 거액의 돈을 싣고 돌아올 때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탁 트인 큰 길이 이어지는 해안가의 7번 국도를 주로 이용했다. 파도 소리가 곁을 따르는 7번 국도를 달릴 때면, 트럭 짐칸에 실린 어마어마한 현금의 무게만큼이나 내 어깨도 무겁게 짓눌리곤 했다.트럭 앞좌석에는 자리가 모자라 1명은 늘 교대로 덜컹거리는 적재함에 타야만 했다. 어느 날, 함께 짐칸에 탔던 청원경찰 S가 쌓여 있는 현금 마대자루를 가리키며 나보고 이른바 ‘돈침대’ 위에 드러누워 보라고 권했다. 흔히 벼락부자가 되면 ‘돈방석에 앉았다’며 부러워들 하는데, 방석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돈더미를 침대 삼아 드러누워 보라니 참으로 기막힌 호사였다. 하지만 막상 누워본 돈침대의 현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단단하게 묶인 지폐 다발들은 돌덩이처럼 딱딱해 이리저리 등이 배겼고, 거친 마대자루의 촉감과 지폐 특유의 매캐한 잉크 냄새가 훅 끼쳐왔다. 게다가 짐칸 틈새로 들이치는 바람에 눈마저 시려 도무지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가만히 누워 흔들리는 짐칸에서 생각에 잠겼다. 돈, 이게 귀신도 부린다는 그 무서운 돈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평생 기를 쓰고, 때로는 울고 웃으며 모으려 애쓰는 그 욕망의 결정체가 바로 내 등 아래에 깔려 있다. 비록 지난 1년간 출납주임으로 매일같이 현금을 만지다 보니 돈이란 그저 무거운 종이 쪼가리일 뿐이라며 자연히 감각이 무디어지긴 했지만, 온몸으로 그 무게를 깔고 눕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살면서 아무나 겪을 수 없는 이 거대한 돈침대 위에서, 나는 잠시 천하를 얻은 듯한 벼락부자의 기분에 취해도 보았다. 그러나 덜컹이는 트럭의 진동이 전해질 때마다 이 엄청난 돈더미 중에 '내 돈은 단 한 푼도 없다'는 차가운 진실이 일깨워져, 허탈하면서도 한편으론 묘하게 홀가분한 웃음이 새어 나오곤 했다.그래서 다음 달에는 담요와 선글라스 그리고 라디오까지 준비하였다. 따뜻한 봄날 돈침대에 누워 흰 구름을 보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유행가들을 듣는 흔치 않은 경험을 은근히 즐겼다. 당시 유행하던 곡들은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이은하의 ‘밤차‘,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등 이었다.수송 작업 초기에는 긴장도 되었으나 별일 없이 몇 번 다녀오자 슬슬 요령이 붙기 시작하였다. 강릉중앙시장에서 회를 떠 와서 적재함에서 둘러앉아 먹곤 하다가, 급기야 여름휴가 시즌 어느 날 삼척 원덕항까지 내려가 회를 먹고 돌아오느라 도착 예정 시간을 한참이나 넘긴 적이 있었다. 늦게 읍내에 들어오는 수송트럭을 알아본 일부 광부와 가족들이 손을 흔들었고, 지점장께서도 ‘피서객들 차량 때문에 많이 밀렸나 보네. 고생 많았다’고 하셨으나 아마 내막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죄송한 마음이 가득해졌다.가을이 되어 업무 변경이 있어 강릉엔 다른 직원이 갔는데, 그날도 도착이 늦어지고 있었다. 지점장께서는 지점 앞에서 트럭이 오는 방향과 시계를 연신 보며 줄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간 얼마나 철없는 행동을 하였는지 부끄러웠다.트럭이 도착하자 후임자를 불러서 당부하였다.“다음부턴 빨리 와. 앞으로 현금을 수송하는 날에는 지점 회식을 하기로 했으니 그때 실컷 먹기로 하자고.”
김
김영한
작품수1
수필(1)
김영한2026. 7. 14.
수필0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