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노 작가

이형노

이형노

작품수1

수필(1)

풀은 태풍에도 뿌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세상에는 사자보다도 억센 입을 가지고, 제자리에서 버티고 사는 생명이 있으니, 그것은 풀이다. 아직은 산하가 풀의 여름 색인 녹색이지만, 곧 가을 색인 다양한 황갈색으로 천천히 바뀌어 갈 것이다. 이제 하늘 가득 알록달록 물들만한 철이 온 것도 같은데, 아직은 해뜨기 전이나, 해지고 난 뒤에나 한여름과 달라진 공기의 냉온을 느낄 수가 있다. 어제 늦은 저녁에 산책길에 나서보니 여름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공지천 변 물의 일렁임이 제대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면 지난여름은 너무 더웠다. 아니 덥다기보다 찌는 듯했다. 꼭 언젠가 한 때 유행하던 증기탕 속에 몸이 든 듯, 눈의 시신경은 자연을 감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야 눈길이 한결 시원해진 공기의 틈새를 비집고 호수의 수면을 본 모습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왔다. 공지천 변 물가 벤치에 앉으니 어둠 속에서도 흔들리는 풀들이 갖가지 색깔의 조명에 의지해서 형체를 드러낸다. 시원한 공기에 흐름을 따라 천천히 일렁이는 풀들의 파동이 느껴진다. 늦봄의 햇살을 받아 보잘것없는 씨의 눈이 터지거나, 또는 지난겨울의 맹추위에 산산이 부서지 버린 몸을 추스르고 빼줌이 싹을 내밀어 자기의 터를 지켜온 풀들이다. 풀은 자기의 터에 불만을 품지 않는다. 그곳이 메마른 곳이라면 이를 악물고 터를 지켜가며 아주 조금씩만 몸을 늘려 가거나, 그러다 물이 없어지면 조용히 세상과 이별을 하고 푸른색을 내려놓고 천자문 첫 구절처럼 누렇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봄의 풀은 연약하다. 이제 겨우 젖니만도 못한 이빨을 가지고 땅을 문다. 혀의 끝을 간신히 내밀어 땅의 맛을 보려 한다. 이때는 어린아이가 밟아도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힘없는 노파의 쟁기질에도 쉽게 제 몸을 하늘에 내놓는다. 조금씩 빨아올려 녹색을 키워가던 몸이 말라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땅에 일단 입을 댔다면 아무리 심술궂은 봄바람이 장난을 쳐도 절대로 물어버린 땅을 놓는 법이 없다. 커다란 나무들이 억세고 커다란 이빨로 땅을 강하게 물고도, 제 이빨 빠질까? 두려워 막 피어오르는 햇순을 무참하게 바람에 내어주는 보신책을 쓰지도 않고, 잘도 버틴다. 여름의 풀은 강인하다, 이빨을 크게 키워 옹골지게 땅을 물고, 땅이 가진, 모든 것을 탐한다. 이때의 풀을 어렵게 노력해서 당겨보면 허연 이빨에 누런 땅을 두세 입은 베어 물고, 뜯겨 나온다. 아무리 거친 태풍과 비바람이 몰려와서 전신을 세차게 때려도 결코 물러섬이 없다. 기세 좋은 커다란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가는 강력한 태풍에도, 풀은 기어코 제 몸을 지켜낸다. 젊은 농부의 거친 쟁기질에도 다 같이 모여 힘을 합친다. 비록 몇몇이 땅과 이별하여 죽임을 당하더라도 강하게 저항하며, 쉽게 그를 지치게 하고 또 포기시킨다. 무쇠도 녹일만한 햇살이 사정없이 풀잎에 거칠게 부딪혀 쏟아져 내리면, 오히려 더욱 강인해진다. 나날이 푸르러지는 청춘이다. 가을이 오면 이 땅의 풀들은 숨이 차오르도록 바쁘다. 여름내 풀의 몸에 붙어 피를 빨던 버러지가 더욱더 극성이다. 한 밤이면 서글픈 목소리로 제짝을 찾으며, 후손을 두려 헐떡인다. 풀들도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안다. 서둘러 꽃송이를 내어 보잘것없는 꽃이라도 무수히 피워내서 많은 씨가 열리도록 노력한다. 형편없이 못생긴 녀석이라도 씨는 많이 남겨야 한다. 그래야 혹시 한 놈이라도 다시 땅에 입을 대고, 대를 이어갈 자식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비록 동물들의 입에 도저히 맞지 않는 맛과 양분일지라도, 그래서 늘 업신여김을 당하고, 없애 버리려는 사람들의 커다란 노력에도 말이다. 이때가 되면 늘 땅을 기어가며 먹이를 찾던, 농부들이 제일 싫어하는 바랭이, 달개비, 또는 닭의장풀, 닭의 밑씻개라는 지저분한 이름을 가진 풀도 어떻게든 몸을 곧추세워 한 가닥의 햇살이라도 더 받아, 씨 만들려고, 그 무엇이라도 붙잡고 일어선다. 농부가 애지중지하는 콩대라도 좋고, 이미 말라비틀어진 옥수숫대라도 좋다. 잡히는 것이 있으면 무어라도 붙잡는다. 필사적이다. 그리고 햇빛 속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래도 조금은 봐줄 만한 달개비라면 모를까? 사람의 눈길을 전혀 끌 수 없는 못난이 바랭이라도 말이다. 사실 풀은 영리하다. 저 혼자만 살겠다고 한정된 땅을 독점하려 하지 않는다. 바랭이가 우거진 풀숲에서도, 이미 바랭이 다음에 땅의 주인이 될 시간을 예비하는 녀석들이 있다. 꽃다지나 냉이, 민들레 같은 풀들은 이미 가을이 한창일 때, 여름내 조용한 기다림의 시간을 뒤로하고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풀숲 사이로 들어찬 늦저녁 이슬을 받아, 밤새 볼품없는 씨앗을 불리고, 조용히 눈을 틔운다. 그리고 풀 속으로 희미하게라도 부서져 들어오는, 빛이 있다면 얼른 이빨을 내어 땅을 물고, 느릿느릿 녹색의 몸을 키워간다. 이 풀들은 앞으로 닥쳐올 차가운 삭풍이 얼마나 두려운지 잘 안다. 몸을 함부로 키우지 않는다. 땅에 납작이 엎드려 땅의 작은 온기라도 받아내려 자세를 한껏 낮춘다. 될 수 있으면 이빨을 땅속 깊이 수직으로 꽂아 내린다. 키는 봄에 커도 된다. 잎을 땅에 붙여 뿌리가 얼지 않도록 준비한다. 꽃과 열매는 봄에 피우고 맺어버리면 또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풀을 조용히 잠재우는 것은, 서리다. 늦봄부터 조금씩 더해가던 풀의 생명줄 이슬이, 어느새 찬 이슬로 바뀌다가 어느 날 홀연히 얼음으로 바뀌어 땅에 내리는 날, 농부가 애써 키워 내던 단맛을 많이 가진 작물이나, 황소 누렁이 말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풀이나 다 같이 공평하게 제 몸의 색을 잃는다. 그리고 전혀 힘이 없는 몸이 되어 땅 위에 주저앉아 버린다. 겨울바람에 이리저리 몸이 찢기며 천천히 먼지가 되고, 동네 아이들의 불장난 감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많은 이들의 눈총을 받아 가면서도 지구에 풍성한 산소를 제공하고, 계절에 순응하며, 살아온 생에 불평 한마디 없다.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렸다’라는 둥 세상 사람들이 풀을 하찮다고 여겨도 풀의 생애는 끈질김과 청초함과 영리함이 있다. 그래서인가? 아름답고 우아하며 간결한 글씨체를 일러 초서라고 한다. 오랜 시간 글쓰기를 연마한 고결한 선비들이 어린애 장난하듯 휘갈겨 쓴 글에 큰 점수를 주고, 풀 초짜를 붙여준 것은, 풀의 정수를 이르는 말이 아닐까? 한다.

이형노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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