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지 작가

정금지

정금지

작품수1

수필(1)

천렵 가는 날

오늘은 사내천으로 천렵 가는 날이다. 고대하던 말복이 열흘이 지났는데도 한증막 같은 더위가 밤낮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맘때 쯤이면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질만도 한데 올해는 웬일인지 날씨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계속 열을 내고 있다. 더위를 피해 오로지 집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집밖으로 나왔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예정된 시간에 우리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스무숲도서관으로 올라갔다. 지난 6월부터 ‘민속놀이에 담긴 인문학 자산’이란 주제로 ‘길 위에 인문학’ 강의가 올해 처음 개설 되었다. 오늘은 7회차로 방학을 끝내고 한 달 만에 다시 모였다. 천렵은 여름철에 주로 남자들이 냇물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즐기는 민속놀이다. 특히 복날을 전후하여 더위를 피하거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잡은 물고기로 탕을 끓여 먹으며 물놀이로 하루를 즐긴다. 천렵이라는 말을 들은지는 꽤 오래 되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시골에 살 때였다. 여름에 어른들이 천렵을 가신다고 하셨다. 그런 날은 할아버지 진지상은 차려지지 않았고, 해질녘 근엄하신 할아버지는 불콰한 얼굴로 돌아오셨다. 남자들이 하던 천렵을 오늘은 여자들도 간다. 30명 가까운 사람 중에 남자는 여섯 분 이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아파트 정문에 와 있는 버스에 올랐다. 우리가 가는 곳은 사내면이다. 예전에는 춘천 땅이었다는데 지금은 화천군이다. 이교수가 정성스럽게 준비해 나눠준 유인물은 깨알같은 글씨로 3페이지나 되었다. 가 본 적이 없어서 사내면에 있는 어느 시골 냇가로 가는 줄 알았는데 유인물을 보니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 김수증의 발자취가 서린 ‘곡운구곡’이었다. 곡운구곡은 사내면 용담리와 삼일리로 이어지는 7km 남짓한 북한강의 지류 하천인 지촌천 구간으로, 산속 계곡 아홉구비 절경을 김수증 호를 따서 ‘곡운구곡’이라 하였다. 물굽이 마다 뜻을 담아 이름을 붙이니 1곡 방화계, 2곡 청옥협, 3곡 신녀협, 4곡 백운담, 5곡 명옥뢰, 6곡 와룡담, 7곡 명월계, 8곡 융의연, 9곡 첩석대이다. 춘천을 떠난 버스는 춘천댐을 지나 한 시간이 안 되어 구곡 중 제3곡 신녀협에 도착했다. 한적한 주차장에 쏟아지는 뜨거운 햇볕은 시원한 계곡 물에 열기를 식힌거 같다. 정자를 비켜나 왼쪽으로 돌에 새긴 시비가 반겼다. ‘곡운구곡 제3곡 신녀협(神女峽)’ 삼곡이라 빈터에는 신녀 자취 묘연한데 / 소나무에 걸린 달은 천년을 흘렀세라 청한자 놀던 뜻을 이제사 알겠으니 / 흰돌 위에 나는 여울 그 모양이 아름답다 청한자는 매월당 김시습 ‘호’이다. 조선 초기 문인, 학자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춘천 청평산에 오랫동안 머무르다 이곳 화악산 아래 삼일리에 잠시 살았다. 김시습 사후 1백년을 훌쩍 넘긴 후에 태어난 김수증이 그가 흠모한 김시습의 다른 호 ‘벽산청은’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는 청은대가 우뚝 서 있다. 2006년에 복원된 정자에는 여초 김응현선생 명필 현판이 걸려 있다. 뒤로 보이는 신녀협 계곡에서 물소리와 같이 올라온 바람이 모처럼 땀을 씻어주었다. 우리는 난간에 빙 둘러 앉아 현장강의를 들었다. 이곳 사내천은 숨어사는 선비를 꿈꾼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성리학자, 서예가이며 명문가의 후예였던 김수증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조용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글 읽기를 좋아하고 예서에 능하였다. 평소 뜻이 고상하여 세상 재미에 담담하였고, 벼슬을 지내기는 하였으나 항상 은둔을 생각하였다. 44세가 되던 해 평강(현 북한 평강군)현감으로 부임하러 가던 길에 춘천을 거처가다 사내면을 보게 되었다. 2 년 후 현감을 그만 두고 이곳 사내면에 살만한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를 짓고 머무르면서 곡운구곡 이름을 붙이고, 평양 화가 조세걸로 하여금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사우 송시열과 영의정을 지낸 동생 김수항이 사사되자 사내면 화음동에 화음동정사를 짓고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김수증이 주자처럼 구곡을 지정하고, 동천(洞天, 하늘동네)을 세우고 이상향을 꿈꾸며 살던 마을에 3백년을 훌쩍 넘어 우리가 천렵을 왔다. 정자를 내려와 돗자리를 하나씩 들고 출렁다리로 갔다. 다리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이 신녀가 노니는 골짜기 신녀협이다. 신녀가 노닐만한 곳이 어디일까. 오른쪽 냇가에 흔하게 볼 수 없는 흰색 너럭바위가 널찍하게 깔려있다. 자취가 묘연한 신녀가 노닐었다면 저 곳이 아닐까. 휘엉청 달 밝은 밤에 너럭바위를 무대삼아 춤을 추는 신녀를 상상해 보았다. 우리 일행은 다리를 건너 그늘진 곳을 찾아 돗자리를 펴고 함께 앉았다. 천렵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교수하고 친구가 내려가 있는 물가로 갔다. 계곡은 그리 깊지도 않고 평평해 보이는데 의외로 물살이 세고, 물소리는 화 난 듯 시끄러웠다. 냇물에 들어가 보려고 바꿔 신고 온 신발은 겨우 적시다 말았다. 건너편에서 관리하는 사람이 위험하다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천렵을 제대로 하려면 물고기를 잡아 탕을 끓여 먹어야 하는데, 도서관 관장님이 준비해 온 수박과 메밀부치기, 메밀전병으로 대신했다. 냇가에서 여럿이 모여 앉아 먹으니 소풍 온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김수증이 살았던 화음동정사지에 들렸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몇 채의 건물이 산재해 있었으나 소멸되고, 바위에 새겨진 글자와 그림만 남아 있다. 현재 있는 삼일정과 송풍정은 복원된 것이다. 좁은 도로에는 양쪽으로 차들이 늘어서 있고, 계곡에는 물놀이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김수증이 오늘 이 모습을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선생이 꿈꾸던 이상향이 혹시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배운만큼 힘써서 이상세계를 건설하고자 했던 선비들, 그들은 목숨까지 걸기도 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축복 받은 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천렵은 물놀이만 못 했을 뿐, 여름내 몸에 쌓였던 더위를 조금이나마 식힐 수 있어서 좋았고, 은둔 생활을 했던 한 선비를 따라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정금지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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