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순

작품수1

수필(1)

노란동백

노란 동백(백 년의 시간을 건너 마주한 천재 작가)정영순 2026년 3월, 햇살 좋은 어느 날. 춘천의 공기는 벌써 여름의 발길질이 느껴질 만큼 달구어져 있었다.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 속엔 연두색 새순들이 고개를 쏘~옥 내밀고 있었다. 바퀴가 신나게 달려 도착한 김유정 문학촌.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갈하게 단장된 초가지붕들이 봄볕을 받아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마당은 누군가의 정성 어린 손길로 깨끗하게 비질이 되어 있었고, 그 위로 내려앉은 화사한 햇살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아늑하게 보듬어 주었다. 건너편 금병산에선 소설 속 점순이가 툭 튀어나올 듯 맑고 청명한 날이다. 나는 예전부터 김유정이라는 작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었다. 대체, 왜 그리 제 몸을 함부로 망가뜨렸는지. 방탕함으로 폐결핵을 앓으며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의 운명이 못내 안타깝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원래 그는 이 동네에서 알아주는 만석꾼 집안의 아들이 아니었나! 남부럽지 않은 배경을 가지고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 길을 걸었는지. 하지만, 김유정문학촌 전시관에서 마주한 그의 생애는 내가 알던 '방탕'과는 결이 달랐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소년. 가산을 탕진한 형의 그늘에서 굶주림과 병마를 친구 삼아야 했던 청년. 그에게 술은 방탕이 아니라, 뼛속까지 시린 고독을 잊게 해줄 유일한 마취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 왔다. 전시관 한쪽에서 그의 생애를 기록한 숫자를 보았다. 스물아홉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그는 소설 30여 편, 수필 12편, 편지와 일기 6편, 그리고 번역 소설 2편을 남겼다. 병마와 싸우며 쥐어 짜낸 그 치열한 기록들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친구(필승)에게 백 원만 빌려달라고 애원하던 가련한 천재.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닭 서른 마리만 고아 먹으면 나을 것 같다."라며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닭 서른 마리를 찾던 그의 마른 손을 잡아줄 수 없는 백 년 뒤의 독자. 내 안의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꺼이꺼이 소리가 되어 글자들을 붙들고, '진작에 좀 그러하지!' 하며 때늦은 타박을 진하게 떨궈본다. 그가 그렇게 술에 취하고 사랑에 미쳐 살았기에, 그의 심장 한 토막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살아나 우리에게 이토록 찌~인하게 다가왔으리라. 그의 소설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면 갈수록 그 압도적인 천재성이 오히려 야속해 나는 그를 많이도 미워했었다. 지독하게 한 여인을 사랑했다면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라는 허울 속으로 비겁하게 숨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원망마저 했었다. 사랑에 목말라 혈서를 쓰고 끈질기게 매달렸던 그의 집착은 어쩌면 일찍 떠나보낸 어머니의 온기를 찾으려던 어린아이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으리라. 그의 소설 속에 흐르는 슬픔은 억지로 짜낸 눈물이 아니라 삶의 밑바닥에서 끌어 올린 진짜배기였다. 그의 언어는 종이 속에 갇혀 있는 활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숙련된 춤꾼의 신명 나고 흐드러진 춤으로, 살아나서 생명체로 변신하는 것이다. 글자들이 종이 속에서 뛰쳐나와 공간을 희롱하며 춤을 추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의 그 전율이란! 어떻게 언어를 이토록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을까. 경이롭다고 할 정도로 그의 문장 실력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문학촌 곳곳에 꾸며진 조형물들은 소설 속 장면들을 재미나게 재현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만난 〈봄·봄〉의 귀여운 캐릭터 인형들은 익살스러웠지만, 그 웃음 뒤에 깔린 서사들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제 것을 지키기 위해 제 벼를 훔쳐야 했던 〈만무방〉의 기막힌 역설. 병든 남편의 옷 한 벌을 위해 가짜 결혼까지 감행했던 여인의 눈물겨운 순박함이 녹아있는 〈산골 나그네〉. 특히 〈땡볕〉에서는 죽은 아이를 배에 품은 채 수술비가 없어 죽어가는 아내에게 얼음냉수 한 그릇과 왜떡 세 개를 건네던 남편과, 눈물로 받아 꾸역꾸역 뱃속으로 밀어 넣으며 마지막 유언을 뱉어내던 부인. ‘목구멍’이라는 통로보다 더 깊고 근원적인 ‘뱃속’으로 생존의 의지를 밀어 넣던 그 장면은 읽는 이의 숨을 멎게 한다. 〈소낙비〉에서는 아내의 몸을 팔아 노름 밑천을 구하는 남편의 울분 터지는 이야기조차 김유정은 특유의 해학으로 감싸 안았다. 비극을 그만의 해학으로 신명 나고 맛깔스럽게 버무려 내는 그의 솜씨는 가히, 독보적이다. 오늘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웠다. 문학촌 곳곳에 핀 노란 생강나무를 보며 빨간 동백꽃을 찾았었는데, 강원도에서는 이 생강나무를 동백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소설집 표지마다 그려진 붉은 동백꽃들 때문에 나처럼 오해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강나무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 봄을 알리는 전령사다. 노란 꽃송이들이 가지마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면 숲 전체가 은은한 생강 향으로 가득 찬다. 붉게 타오르다 툭 떨어지는 화려한 동백이 아니라, 톡 쏘는 향기를 내뿜으며 산기슭을 노랗게 물들이는 소박하고도 강인한 생강나무꽃이 진짜 김유정의 얼굴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문장의 겉모습만 보고, 그 속에 숨겨진 노란 진심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오늘 내 콧속을 콕 하고 때리던 노란 동백의 톡 쏘는 향취는, 어쩌면 김유정이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치열한 숨결이었는지 모른다. 스물아홉, 그 짧고 강렬한 생을 쥐어짜 만든 노란 동백꽃의 채취. 이 노란 꽃이 산기슭을 물들일 때 그가 세상을 떠났고, 해마다 이맘때면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꽃이 피어날 때 작가는 지고 있었으니, 이 노란 향기야말로 그가 남긴 가장 강렬한 유산일 것이다. 정갈한 김유정 문학촌을 나서며 나는 비로소 그를 향한 미움을 거두기로 했다. 글자와 한바탕 신명 나게 놀다 간 천재 작가의 춤사위에, 이제는 내 마음도 기꺼이 박자를 맞추며 겸손히 젖어 든다. 백 년의 시간을 건너온 그의 고단한 영혼 앞에, 나는 오늘 노란 동백 향기를 빌려 깊은 추모의 마음을 보낸다.

정영순2026. 7. 14.
0
0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