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망설이다 봄이 오면서 치과에 갔습니다. 의자에 앉을 때부터 긴장이 됩니다. 조금 전에 찍은 치아의 흑백 사진이 눈앞에 떠 있습니다. 거기에 이름과 나이가 적혀있는데 실제 나이보다 두 살이 적습니다. 생일을 기준으로 하는 만 나이입니다. 두 살이 적은데도 숫자로 보니 나이가 참 많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1960년 1월 1일 시행되어 2023년 6월 28일 정부에서는 만 나이 통일법 시행령 제정을 통해 기본적인 나이 기준이 만 나이임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만 나이를 내 나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요즘은 몇 살이냐고 묻는 것보다 몇 년생이냐고 묻기도 해서 굳이 숫자를 얘기하는 적은 별로 없습니다.
만 나이에 두 살을 더해 봅니다. 반올림이 아니라도 머지않아 둘째 자리로 옮겨 갈 것 같습니다. 언제 저 나이가 됐는지 내 나이 같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시어머니가 사셨던 나이만 같습니다. 아직 가을은 멀리 있는데 마음이 스산해집니다. 어렸을 적에는 만둣국이 나이인 줄 알았습니다. 설이 되면 어른들은 만둣국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고 어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왜 나이를 ‘먹는다’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두는 어린 내 주먹보다 커 보였습니다. 그때는 나이와 상관없이 만두가 먹기 싫었습니다. 먹기 싫어도 먹은 만둣국처럼 나이가 그렇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는 잔주름이 늘어가고, 쉽게 피곤해서 지는 몸, 예전만 못한 기억력 앞에서도 나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때가 종종 있습니다. 슬프게도 마음이 나이를 따라오지 않고 서성이고 있습니다. 이 나이를 거부할 수는 없지만 어느 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어느 날, 쉽게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은 신문을 뒤적이다 누렇게 변한 신문에서 ‘윤희영의 News English’에 소개된 ‘눈물이 나도록 살아라.’ 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36세에 두 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난 영국의 젊은 엄마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간과 폐로 전이되어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22개월을 더 살았습니다. 그녀가 남긴 블로그 내용입니다.
“살고 싶은 나날이 저리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 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딸아이 머리 땋아줘야 하는데‧‧‧, 아들 녀석 잃어버린 레고의 어느 조각이 어디에 굴러 들어가 있는지 저만 아는데 그건 누가 찾아 줄까요.
1년 보너스 얻은 덕분에 아들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학교에 데려다주는 기쁨을 품고 갈 수 있게 됐습니다. 3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늘어나는 허리둘레 가져보고 싶고, 희어지는 머리카락 그거 한번 뽑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는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대장과 간의 종양을 제거하기 위한 두 번의 수술, 25차례 방사선 치료, 39번의 끔찍한 화학요법 치료도 견뎌냈다는 그녀.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 다 받아봤다고 했습니다. 삶의 끝을 너무 이르게 마주한 젊은 엄마의 글 보며 목이 메어왔습니다. 하루하루가 절박한 그녀 이야기에 늙어가는 나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생각은 사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찌 먼 나라 그녀만의 이야기겠습니까.
망각도 신의 축복이라지만 한동안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말처럼 살았습니다. 이 나이까지 오면서 가슴 철렁이게 응급실을 드나든 적도 있었고, 며칠씩 입원한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죽음이 너무 흔해서 가슴 졸이던 코로나19 팬데믹이 종식된 지 겨우 2년 남짓인데, 언제였나 싶게 아득하게 느껴지는 건 나이가 든 때문일까요. 이 험한 세월에 하루하루를 별일 없이 살고 있는 건 기적인지도 모릅니다. 늙어가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매일을 선물처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세월 앞에 겸허해집니다.
언젠가는 내일이 오지 않는 때가 생기겠지요.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다가 피천득 선생님 글 ‘신춘’에서 한 줄을 찾았습니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작은 인연들, 그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