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과 김유정문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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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전국 최초로 ‘문화 도시’로 선정되면서 춘천은 이름과 실재가 일치하는 문화 도시로 자리매김의 주초석(柱礎石)을 놓았다. 춘천이 문화 도시로 가는 여정을 소급하면, 소설가 김유정도 문화 도시로 이행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춘천은 높은 산으로 둘러친 전형적인 분지 형태이다. 춘천을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화악산(1,468m)이 가장 높고 이 산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용화산(878m) 청평산(779m) 가리산( 1051m) 대룡산(899m)이 이어지고, 남쪽으로 금병산(652m) 좌방산(502m)이 이어지고, 서쪽으로 삼악산(654m) 계관산(730m) 북배산(867m) 가덕산(858m) 몽덕산(690m)이 원형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북동쪽이 구릉을 이루며 서남쪽으로 완만하게 낮아지며 들판을 형성하고, 이 사이로 소양강과 자양강이 동북쪽으로부터 흘러와 서남쪽을 관통하며 신연강을 이루고 서쪽으로 흐른다. 이러한 지형 특징으로 인해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춘천은 국가의 안위와 사직을 보존할 수 있는 지역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의 고종은 춘천에 궁을 짓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이러한 배경 아래 조성된 궁이 춘천이궁이다. 이궁이란, 임금이 변고나 뜻하지 않은 일이 있을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세운 궁을 말한다. 춘천에 이궁이 세워지고 이궁으로 춘천은 도호부에서 지금의 직할시 개념인 유수부로 승격하였고, 이를 계기로 1896년 강원도 관찰부로 승격하면서 강원도 도청 소재지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유정은 시대가 급변하는 대한제국기의 끝자락인 1908년 춘천 실레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일제에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고 1907년 군대마저 해산되는 과정을 겪으며 일제강점기란 불행한 역사의 중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이른 나이에 조실부모하여 고아가 되었고, 형의 가산 탕진으로 넉넉함 대신에 뼈저린 가난을 경험해야 했다.

서울에서 만난 첫사랑이자 끝 사랑이 되어버린 조선의 명창 박녹주와의 만남도 알곡은 한 톨 없이 쭉정이만 남은 짝사랑이었다. 김유정에게 위로는 글쓰기에서만 가능했다. 김유정의 소설에는 한학(漢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는다. 그 당시 보통 사람이 쓰는 말이자 대화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까닭에 그의 소설에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보통 사람과 하층민의 모습, 현실 그대로의 풍경, 당대의 춘천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토속어로 이루어졌다.

김유정의 만년 삶은 여러모로 참혹했다. 늑막염(肋膜炎)과 결핵으로 이어지는 병고와 경제적 무력은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고 구인회를 중심으로 함께 했던 이상이나 절친 안회남을 제외하면 교류하던 문사도 없었다. 김유정은 29세란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하고 우리의 곁에서 떠난 듯 보였다.

춘천은 전형적인 고립형 분지로 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고립형 분지 사이로 소양강과 자양강이 도심을 관통하며 흐르다가 신영강으로 합류한다. 이러한 지형 특색으로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에서 수계(水界)로 평양에 이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하였다.

춘천의 지리적 특성은 1960년대에 이르러 댐 건설로 이어졌다. 1965년 춘천댐이 완공되고 1967년에 의암댐이 준공되고 1973년에 소양강댐이 완공되면서 물의 도시로 주목을 많이 받았다. 특히 의암댐으로 만들어진 의암호수는 춘천 도심에 있었고 1968년에 거대한 호수로 변하였다.

의암호는 너비 5㎞, 길이 약 8㎞, 면적 17㎢에 이르는 거대한 인공 호수로 여의도 면적의 약 6배에 해당하며, 캠프페이지 면적의 약 12배에 해당하는 크기다. 의암호는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언론에 보도가 이어졌으며 ‘호반의 도시’로 중앙지에 소개되었다. 이 해가 1968년으로 의암댐 근처 의암호 가에 ‘김유정문인비’가 세워졌다.

의암호 담수는 호반의 도시에 걸맞은 인물로 김유정을 소환했고, 3년 뒤인 1971년에 춘천고 미술부가 주축이 되어 라인강 로렐라이 언덕의 인어상을 본뜬 의암호 인어상이 등장했다. 1968년 김유정문인비 제막식에 김유정의 첫사랑이자 끝 사랑인 박녹주 명창을 초대했다. 그러나 박녹주 명창은 참석하지 않았고 다만 ‘김유정이 이렇게 유명해질 줄 알았으면 사랑을 받아줄걸’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김유정은 국어 교과서에 소설이 실리며 유명세를 받기도 하고 지역 언론에 면면히 주목받으며 이름이 세상에 전파되었다. 김유정이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된 계기는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갖춘 김유정문학촌이 2002년 8월 6일 개관하면서부터다. 이러한 기세는 2004년 12월 1일 한국 철도 최초로 인물명을 딴 김유정역을 탄생시켰고, 2012년 12월 21일 수도권 전철인 경춘선 개통으로 새 역사(驛舍)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새 역사는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졌으며 역명판과 행선판이 수도권 전철역 가운데 유일하게 궁서체로 표기되어 있어 토속어 중심의 김유정 소설과도 맥이 닿아 있기도 하다. 이로부터 남이섬과 더불어 일 년 방문객이 백만이 넘는 획기적인 문화 관광지로 자리매김하였다.

김유정 소설가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지역적 특성이 현대에 이르러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인가? 그가 남긴 대표 소설은 봄봄과 동백꽃이다. 두 대표 소설이 춘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소설 제목 동백꽃은 영서 지역에서 자생하는 생강나무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어서 더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 지역 특성이 강하게 묻어나는 작품을 기반으로 김유정만이 써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큰 것이리라.

춘천이 문화 도시이자 문학 도시로 나아가는 데 있어 김유정은 어느 작가보다 주요하고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김유정 소설가가 춘천을 중심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과정에서 의암댐 담수에 맞추어 세워진 김유정문인비는 춘천 지역 문인에게 있어 성지와 같은 곳이기도 하다. 김유정문인비가 세워진 46번 국도는 춘천에서 서울로 가는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다. 지금도 46번 국도를 가꾸면서 1970년대 심어놓은 벚나무는 아름드리로 남아 구간 구간 아직도 벚꽃을 피운다. 김유정문인비 곁 벚나무 또한 이때 심었는데, 만약 벚나무 대신 이 구역만큼은 생강나무(동백나무)로 심었으면 하는 아쉬운 바람을 하곤 한다.

만약 김유정문인비를 세우던 1968년 명창 박녹주가 참석했다면 어떠했을까?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했던 김유정은 저 하늘에서 함박웃음 지으며 다 못한 연정의 짐을 내려놓았을까? 지금 한 창 꽃망울을 머금고 박녹주 명창이 찾아오는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을까! 이번 주말에 화사하게 핀 벚꽃을 구경하러 46번 옛 경춘국도에 나들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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