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는 백두대간의 첩첩산중 점봉산 기슭에 자리잡은 상치전(꽁밭이)에서 태어나셨다. 이곳은 아침해가 뜨면 산이 높아 하루에 농사를 지을 때 하루갈이(아침갈이)를 해야하는 산촌이다.
장날이면 삼십리 길을 걸어서 기린장을 다녀와야 하는데, 새벽밥을 지어먹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서 한번 다녀 올라치면 초승달이 보일 때야 집에 도착하는 산간 오지마을이다.
어머니가 시집을 오기 전 생활하셨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시작된 것은 치매 증세가 나타날 때였나 보다.
6년 전 어머니는 더운 여름에 땀을 뻘벌 흘리시면서도 에어컨을 켜지 못하게 하셨다. 내가 더위에 못 이겨 에어컨을 작동시키면 소리를 지르시면서 추운데 켠다고 야단을 치시곤 하셨다.
저녁때가 되면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커튼을 치라고 야단을 치시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치매가 서서히 뇌혈관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나 보다.
여름이 지나고 필레 단풍 터널이 있는 상치전에도 아름다운 단풍이 온 산을 뒤덮고 있을 무렵, 어머니는 고향의 단풍을 보고 싶다고 드라이브를 가자고 응석을 부리시면 나는 못 이기는 척 하면서 춘천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고개를 지날 때마다 어머니는
“내가 아범을 업고 다녔잖니”
하고 말씀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 말씀에 반박을 하면서
“엄마, 언제 우리가 춘천에서 살았어. 우린 말이야 어렸을 때는 역골서 살았어”
하면
“아냐, 내가 너를 업고 다니면서 나물을 뜯었어”
하고 우기셨다.
고개만 보면 나를 업고 다녔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럴 때마다 소리 없는 눈물이 내 가슴을 적시곤 하였다.
치매란 병은 약이 없다는 불치병인데 왜 하필 어머니한테 야속하게 찾아왔는가 하면서 한숨을 내쉬곤 하였다. 차창에 보이는 단풍은 곱디 고운데 내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어머니께 주간 보호센터에 가자고 여쭤보면 손을 절래절래 내저으시면서 그곳은 노인들을 구박하고 때리고 못살게 구는데 자신을 거기 보내려면 내다버리라고 하시면서 역정을 내시곤 하였다. 이런 상황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보호소를 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하면서 나는 계속 자책하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는 밤중에도 딸네 집과 멀리 있는 아들네 집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하였다. 늦은 밤에 전화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하룻밤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잘 있냐” 하시면 동생들은 짜증을 내기도 하였다. 자녀들의 안부를 묻곤 하였지만 그것이 치매 초기증상처럼 보였다. 한밤중에도 주무시다 나와서 동생 집에 전화를 거실 때는 언성이 높아지고 때로는 전화를 빼앗곤 하기도 하였다. 한밤중의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는 맥이 풀려 주무시면 난 더 공허함과 외로움 무서움이 몰려오곤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문밖을 나와서 하늘에 별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찬 공기를 마시며 정신을 가다듬곤 하였다.
어머니는 삼년 동안 곰탕에 떡국만 찾으셨다. 나는 매일 같이 마트에 가서 곰탕과 가래떡을 사다 드렸다. 다른 음식을 드셔야 된다고 말씀을 드려도 듣지 않으시고 떡국만 고집하셨고 식사를 한 후에는 믹스커피에 황색 설탕 두 스푼을 넣어서 드시곤 하셨다. 반복되는 일상생활로 나는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 어머니가 쇠약해지는 모습이 차츰 눈에 들어오면서 걱정이 앞섰다. 어머니는 평상시에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는데 치매가 시작되면서 일본 시대에 불렀던 한 맺힌 노래를 부르시곤 하셨다.
“일본 동경이 뭘 그리 좋아서 꽃 같은 나를 두고 연락선 타느냐. 에어냐노냐노 에어냐노냐노 어기여차 뱃노래 가잔다”
이런 소리를 하시면서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기도 하셨고 아들에게 응석을 부리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이제 모두 추억으로 남아 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니 지금은 그리움만 사무친다.
그러시던 어머니는 노환에 치매에 담석증이 와서 지난해 10월 세상의 단풍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을 때 소천하셨다.
지금은 아버님과 아름다운 시간을 천국에서 보내시리라 생각하면서 그리움을 삼킨다.
주말에는 어머니의 성경책을 들고 어머니의 부름으로 교회를 나가면서 어머니가 앉으셨던 교회 예배 자리에 앉아 사무쳐 오는 그리움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교회를 가실 때 현관 앞에서 본인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면서 “내 모습 괜찮니”, “이 모자는 어떻니” 하고 나에게 물어보시던 모습을 그리면서 나도 주일날 현관에 있는 거울을 보면서 어머니와 똑같이 나에게 “내 모습 괜찮나” 하면서 교회를 갔다 올 때는 발걸음마다 그리움이 발자국 되어 따라다닌다.
어머니를 좋아했기에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애타는 마음을 다시 적어보면서 살아 생전에 더 효도하지 못한 아픔을 억지로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