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감나무에 걸린 어머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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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2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설 때면 마음의 안식처이자 영원한 고향인 백두대간 끝자락에 자리잡은 방태산 아래의 하남리가 어김없이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방태산 자락은 보일 듯 말 듯 신비롭게 모습을 감추고 그 사이로 자작나무는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노랗게 물든 마지막 잎새들은 가을의 끝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애잔한 풍경을 연출하곤 한다.

  2. 그 무렵 학교 앞 연정이네 텃밭에서는 연정이 할머니가 서리태 콩을 털고 계셨다. 높이 쌓인 콩대를 하나씩 걷어내며 부지런히 콩을 털던 모습은 겨울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콩대 사이로 보이던 가을걷이에 분주한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이 문득 떠오른다.

  3.  우리 집 마당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겨울이 가까워지니 모든 잎을 떨구고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까치밥으로 남겨둔 붉은 감 하나만이 외롭게 매달려 있다. 그 앙상한 가지의 모습은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의 여윈 몸과도 같아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4. 그 감나무는 40년 전 어머니께서 이웃 아주머니께 얻어와 애지중지 키우신 나무로 어느덧 마흔 해를 넘긴 귀한 생명이다. 생전에 어머니는 가을이면 주렁주렁 달린 감을 올려다보며 까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곤 하셨다. 감나무를 자식보다 더 귀하게 돌보시던 어머니는 수확 때면 하나하나 정성껏 따서 큰 고무 대야에 담고 깨끗한 천으로 닦아 홍시가 되기를 기다리셨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자식들에게 보내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었으리라. 이제 그 감나무는 우리 집의 보물 1호로 남아 있고 겨울이 올 때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달고 단 감맛이 애절한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

  5. 12월이 되어 감나무의 앙상한 가지를 바라보면 이 해의 끝자락이 왔음을 실감한다. 성탄의 설렘과 제야의 종소리가 어우러지던 이 계절은 한 해를 돌아보고 삶을 성찰하던 시간이었고, 새로운 시작 또한 12월의 끝에서 맞이하곤 했다.

  6.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새해를 맞기 위해 온 국민이 동해·서해·남해로 떠나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던 시절도 떠오른다. 올해는 변혁과 지혜,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며 생명력과 성장을 나타내는 '을(乙)'과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동물인 '사(巳)'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을사년이었다. 또 한 해를 마무리하며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7.  올 가을엔 유난히 비가 지루하게도 많이 내렸다. 비가 그친 뒤 파랗던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 시간이 부족했고 필레의 단풍나무조차 색동저고리로 갈아입을 여유가 없었다. 충분히 물들지 못한 산천초목을 바라보며 가을의 끝자락을 보낼 때면 그 아쉬움만이 마음 깊숙이 남는다.

  8.  12월, 내 생일이 있던 그 무렵이면 싸리나무와 잡목으로 만든 집 울타리 너머로 갈치 장수가 이른 아침 “갈치 사려, 갈치 사려!”를 외치며 마을을 지나갔다. 그 소리를 들으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서둘러 나가 갈치 한 손을 사서 생일 상으로 갈치 묵은지찜을 해주셨다. 그 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리움과 군침이 절로 고인다. 그것이 바로 12월의 맛,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문턱에서 맛볼 수 있었던 고향의 맛이다.

  9.  감나무 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을 때면 어머니의 손맛이 더욱 그립다. 겨울이 시작되면 한 해 동안 겪어온 단맛과 쓴맛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날이 차고 서리가 내리고 첫눈이 올 때면 어머니의 갈치 묵은지찜 맛이 더욱 간절해지고 그때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가리라 조용히 다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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