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자 작가

최영자

최영자

작품수1

수필(1)

밤에 피는 무궁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요가를 시작할 때 쯤 스쳐지나가듯 강사가 말했다. 길 건너 공원이 새롭게 단장되어 자주 간다고 했다. 귀가 솔깃해졌다. 나는 요가가 끝나자마자 운동화에 엔진을 달은 속도로 갔다. 신호등 하나 건너면 닿는 곳인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큰 공사를 할 것이라는 상상은 못했었다. 1년 전에 시청에서 30억의 많은 예산을 들여 만들어 놓은 곳이라고 한다. 가끔씩 지나갔던 동네 놀이터가 모르는 사이에 산책로까지 갖춘 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공원 초입새에는 어린이놀이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튼튼한 나무배도 있고 미끄럼틀도 있다. 모래놀이를 위한 절약형 수도시설도 있다. 머리 위로는 직사광선을 막아주는 오색의 높다란 가림막이 아늑해 보였다. 밤9시의 모래바닥은 수많은 발자국이 가로등 빛에 의해 무채색의 추상화처럼 보였다. 나의 최애 시설인 모래장이다. 10억짜리가 내 것이 되는 순간이다. 운동화를 벗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더없이 부드러운 모래가 내 발바닥을 온전히 받아 주었다. 50m 남짓한 놀이터 둘레를 계속 걸었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땅과 사람의 접지효과 는 수분이 있을 때 3배나 높아진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들이 물장난했던 축축한 모래를 찾아 뱅글뱅글 돌며 걸었다. 밤이 깊어지자 주변을 산책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아파트 불빛을 따라 사라졌다. 그 때였다. 느티나무 옆에서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아하하하! 언니 술래지?” 초등학생 두 딸과 아빠가 놀이를 시작한 것이었다. 잠시 후, 민첩하지 못한 아빠는 술래가 된 큰딸에게 손가락을 걸게 되었다. 동생은 재빠른 걸음으로 술래 주변에 이르렀다. 드디어 손가락 해제 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때, 동생은 술래 근처를 살금살금 맴돌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놀이가 계속해서 어떻게 이어질지 귀가 쫑긋해졌다. 몸집이 우람한 아빠도 아이들과 한마음으로 재미있게 놀고 있다. 다른 공간을 걷고 있는 나도 합류하고 싶을 정도였다. 놀이는 인간의 생존과 관련이 있는 활동과 일을 제외한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활동으로 이해관계를 떠나 목적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으로, 즐거움과 흥겨움을 주는 인간 활동이다. 그래서 놀이는 재밌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공감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자유로움과 놀이를 하는 사람의 자발적인 참여가 존중되어야 진정한 놀이이다. 두 딸의 목소리엔 즐거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 소리는 어둠을 뚫고 하늘까지 퍼져 나갔다. 직장에서 벗어나 주말을 맞은 아빠는 ‘무궁화꽃’을 통해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재미있는 활동에 빠진 세 부녀는 꽃이 피고 지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들이 노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갔으니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공감력도 확실했다. 어쩌면 딸이 아니라 아빠가 먼저 무궁화 꽃을 피우자고 말했을 지도 모른다. 인류는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하니까. 밤이 깊은 지금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손가락으로 자판을 토닥토닥 머리 속 공원을 걷는다. 놀이터의 풍경과 느낌이 손끝에 따라 나온다. 머리 위로 전등이 물끄러미 바라볼 뿐 누구의 간섭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다. 글쓰기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클릭하여 글을 읽고 나면 웃음으로 때론 짠하게 공감하며 ‘좋아요’ 누르고 난생처음 댓글도 달기 시작했다. 나도 지금 글쓰기 ‘놀이’를 하고 있다.

최영자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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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