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이 찾아오면 우리 집 담장 위로 아침 햇살을 가득 머금은 장미 넝쿨이 축제의 춤을 추듯 피어난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몸짓이 싱그럽다.나는 매일 아침 여섯 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잠옷 차림 그대로 마당에 나서서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꽃송이가 새로이 피어났는지 확인하는 것이 하루의 첫 일과다.환한 웃음으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듯한 장미를 마주하면, 내 심장도 어느새 기분 좋게 뛰기 시작한다. 새벽녘의 싸늘한 공기 속에서 설렘으로 가득한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사실 처음부터 거창한 뜻이 있어 울타리에 장미를 올린 것은 아니었다. 단독주택인 우리 집은 비교적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골목길에 자리하고 있는데 담장이 낮아 늘 허전했다. 울타리 삼아 장미를 심으면 고운 꽃도 매일 볼 수 있고 가시 덕에 은근히 도둑을 막는 방범 효과도 있겠다는 다소 실용적인 계산이 앞섰던 게 사실이다.그렇게 장미와 동거를 시작한 후, 문득 이 꽃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인터넷을 뒤적여보았다. 장미의 역사는 생각보다 아득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 시절에는 주로 서아시아와 소아시아 지역의 야생종들이 재배되었는데 이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교잡이 일어나며 오늘날처럼 다양한 변종이 출현했다고 한다. 당시의 장미는 신화 속 상징이나 의학, 향수, 장식 등 삶의 전방위에서 귀하게 쓰였다. 특히 고대 로마에서는 귀족과 황제의 연회나 장례 의식에 결코 빠지지 않는 특별한 식물이었다고 전해진다.무엇보다 장미의 향은 참으로 오묘하다. 그 향기는 단순히 달콤하다거나 향긋하다라는 보편적인 형용사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오죽하면 해외에서도 다른 수식어 대신 그저 장미향이라는 고유한 명사 자체로 그 느낌을 설명할까.장미의 꽃말 역시 흥미로웠다. 꽃의 색깔마다 품고 있는 의미가 저마다 달랐다. 심지어 송이 수에 따라 의미가 변하기도 하고 같은 색깔인데도 정반대의 꽃말을 지닌 경우도 있었다. 널리 알려진 붉은 장미는 사랑과 아름다움, 낭만과 용기, 그리고 열정과 열망을 뜻한다. 한 송이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고 덜 피어난 꽃봉오리는 순수와 사랑을 의미한단다.재미있는 것은 조합에 따른 의미다. 붉은 장미와 흰 장미가 만나면 통합을 징하고 붉은 장미와 노란 장미가 어우러지면 쾌활함과 행복을 뜻한다니 장미가 품은 이야기는 실로 무궁무진했다.설화 속에 깃든 장미의 탄생 배경도 애틋하다. 옛날 한 구두쇠 향수 상인에게는 로사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로사는 집안의 꽃밭에서 일하던 청년 바틀레이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바틀레이는 매일 아침 꽃을 따서 향수를 만들었는데 그중 가장 귀하고 좋은 향수 한 방울씩을 따로 모아 로사에게 선물하곤 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바틀레이가 전쟁터로 징집되자 로사는 연인을 대신해 꽃밭을 돌보며 그가 했던 것처럼 가장 좋은 향수를 한 방울씩 모으며 눈물로 기다렸다.오랜 기다림 끝에 들려온 것은 연인의 전사 소식이었다. 타인이 전해준 작은 상자 속 바틀레이의 유해를 안고 로사는 미어지는 슬픔 속에서 그간 모아둔 귀한 향수를 유해 위에 모조리 뿌려버렸다. 이를 본 탐욕스러운 아버지가 홧김에 유해에 불을 질렀고 슬픔에 겨워 곁에 있던 로사마저 그 불길에 휩싸여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로사가 숨진 그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장미라는 이야기다. 붉은 장미의 빛깔이 그토록 강렬한 것은 어쩌면 가슴 절절한 사랑의 흉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장미에 얽힌 이야기를 읽다 보니 오래전 일이 떠올라 혼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나름대로 로맨틱한 이벤트를 한답시고 안식구의 직장으로 장미 꽃바구니를 보낸 적이 있었다. 로맨틱한 감동을 기대했건만 돌아온 것은 칭찬 대신 핀잔이었다. 쑥스러움이 많은 아내에게 직장으로 배달된 화려한 꽃바구니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차라리 퇴근길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고 왔으면 훨씬 점수를 땄을 텐데 말이다. 그 해프닝 이후로 내 생애 꽃 선물은 영영 막을 내리고 말았다.우리는 보통 특별한 날이 오면 약속이라도 한 듯 장미를 선물한다. 비록 출처가 불분명한 완전한 창작이거나 장사꾼들의 상술일지라도 송이 수에 담긴 꽃말들은 여전히 낭만적이다. 한 송이는 ‘첫눈에 반했습니다' 열 송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당신' 백 송이는 ‘백 퍼센트의 사랑' 그리고 삼백육십오 송이는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매일 같이 사랑스러운 당신' 급기야 구백구십구 송이는 ‘어느 생이건 당신만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이라니 이쯤 되면 장미는 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사랑의 활력소를 불어넣기 위해 태어난 식물이 아닐까 싶다.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면 내 시선은 자연스레 어머니의 기억으로 향한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 장미를 꺾어 투박한 꽃병에 꽂아두고 아기처럼 흐뭇해하시던 고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월의 햇살이 따스해지면 어머니의 마른 손길은 늘 담장 너머 장미 넝쿨을 향해 있었다. 이제 어머니는 곁에 계시지 않지만 그 손길이 닿았던 담벼락에는 여전히 매년 눈이 시리도록 붉은 장미가 피어난다. 어머니의 온기가 남은 골목길 우리 집 담장 앞을 지나가는 이웃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장미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가 있다. 그 모습을 담 너머로 가만히 훔쳐보고 있으면 내 마음까지 덩달아 넉넉하고 뿌듯해진다.꽃이 피어나는 담벼락과 온기가 감도는 골목길은 그 자체로 지나는 이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이자 마음으로 전하는 작은 선물이 아닐까. 앞만 보고 바쁘게 살아가는 이 고단한 시대에 담장 위 장미 넝쿨이 이 골목을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잠시나마 숨을 고르고 쉬어갈 수 있는 따스한 쉼표가 되어주기를 소망해 본다.오늘 아침도 싱그럽게 피어난 장미를 바라보며 나태주 시인의 유명한 시구(詩句)를 조용히 읊조려 본다.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우리 집 담장의 장미도 이 길을 지나는 수많은 이웃의 삶도 모두 그러할 것이다.

오일주
한 글자 한 획에 마음을 담습니다.
수필(3)
어머니께서는 백두대간의 첩첩산중 점봉산 기슭에 자리잡은 상치전(꽁밭이)에서 태어나셨다. 이곳은 아침해가 뜨면 산이 높아 하루에 농사를 지을 때 하루갈이(아침갈이)를 해야하는 산촌이다. 장날이면 삼십리 길을 걸어서 기린장을 다녀와야 하는데, 새벽밥을 지어먹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서 한번 다녀 올라치면 초승달이 보일 때야 집에 도착하는 산간 오지마을이다. 어머니가 시집을 오기 전 생활하셨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시작된 것은 치매 증세가 나타날 때였나 보다. 6년 전 어머니는 더운 여름에 땀을 뻘벌 흘리시면서도 에어컨을 켜지 못하게 하셨다. 내가 더위에 못 이겨 에어컨을 작동시키면 소리를 지르시면서 추운데 켠다고 야단을 치시곤 하셨다. 저녁때가 되면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커튼을 치라고 야단을 치시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치매가 서서히 뇌혈관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나 보다. 여름이 지나고 필레 단풍 터널이 있는 상치전에도 아름다운 단풍이 온 산을 뒤덮고 있을 무렵, 어머니는 고향의 단풍을 보고 싶다고 드라이브를 가자고 응석을 부리시면 나는 못 이기는 척 하면서 춘천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고개를 지날 때마다 어머니는 “내가 아범을 업고 다녔잖니”하고 말씀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 말씀에 반박을 하면서 “엄마, 언제 우리가 춘천에서 살았어. 우린 말이야 어렸을 때는 역골서 살았어” 하면 “아냐, 내가 너를 업고 다니면서 나물을 뜯었어” 하고 우기셨다. 고개만 보면 나를 업고 다녔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럴 때마다 소리 없는 눈물이 내 가슴을 적시곤 하였다. 치매란 병은 약이 없다는 불치병인데 왜 하필 어머니한테 야속하게 찾아왔는가 하면서 한숨을 내쉬곤 하였다. 차창에 보이는 단풍은 곱디 고운데 내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어머니께 주간 보호센터에 가자고 여쭤보면 손을 절래절래 내저으시면서 그곳은 노인들을 구박하고 때리고 못살게 구는데 자신을 거기 보내려면 내다버리라고 하시면서 역정을 내시곤 하였다. 이런 상황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보호소를 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하면서 나는 계속 자책하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는 밤중에도 딸네 집과 멀리 있는 아들네 집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하였다. 늦은 밤에 전화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하룻밤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잘 있냐” 하시면 동생들은 짜증을 내기도 하였다. 자녀들의 안부를 묻곤 하였지만 그것이 치매 초기증상처럼 보였다. 한밤중에도 주무시다 나와서 동생 집에 전화를 거실 때는 언성이 높아지고 때로는 전화를 빼앗곤 하기도 하였다. 한밤중의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는 맥이 풀려 주무시면 난 더 공허함과 외로움 무서움이 몰려오곤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문밖을 나와서 하늘에 별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찬 공기를 마시며 정신을 가다듬곤 하였다. 어머니는 삼년 동안 곰탕에 떡국만 찾으셨다. 나는 매일 같이 마트에 가서 곰탕과 가래떡을 사다 드렸다. 다른 음식을 드셔야 된다고 말씀을 드려도 듣지 않으시고 떡국만 고집하셨고 식사를 한 후에는 믹스커피에 황색 설탕 두 스푼을 넣어서 드시곤 하셨다. 반복되는 일상생활로 나는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 어머니가 쇠약해지는 모습이 차츰 눈에 들어오면서 걱정이 앞섰다. 어머니는 평상시에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는데 치매가 시작되면서 일본 시대에 불렀던 한 맺힌 노래를 부르시곤 하셨다. “일본 동경이 뭘 그리 좋아서 꽃 같은 나를 두고 연락선 타느냐. 에어냐노냐노 에어냐노냐노 어기여차 뱃노래 가잔다” 이런 소리를 하시면서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기도 하셨고 아들에게 응석을 부리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이제 모두 추억으로 남아 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니 지금은 그리움만 사무친다. 그러시던 어머니는 노환에 치매에 담석증이 와서 지난해 10월 세상의 단풍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을 때 소천하셨다. 지금은 아버님과 아름다운 시간을 천국에서 보내시리라 생각하면서 그리움을 삼킨다. 주말에는 어머니의 성경책을 들고 어머니의 부름으로 교회를 나가면서 어머니가 앉으셨던 교회 예배 자리에 앉아 사무쳐 오는 그리움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교회를 가실 때 현관 앞에서 본인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면서 “내 모습 괜찮니”, “이 모자는 어떻니” 하고 나에게 물어보시던 모습을 그리면서 나도 주일날 현관에 있는 거울을 보면서 어머니와 똑같이 나에게 “내 모습 괜찮나” 하면서 교회를 갔다 올 때는 발걸음마다 그리움이 발자국 되어 따라다닌다. 어머니를 좋아했기에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애타는 마음을 다시 적어보면서 살아 생전에 더 효도하지 못한 아픔을 억지로 달래본다.
12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설 때면 마음의 안식처이자 영원한 고향인 백두대간 끝자락에 자리잡은 방태산 아래의 하남리가 어김없이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방태산 자락은 보일 듯 말 듯 신비롭게 모습을 감추고 그 사이로 자작나무는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노랗게 물든 마지막 잎새들은 가을의 끝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애잔한 풍경을 연출하곤 한다.그 무렵 학교 앞 연정이네 텃밭에서는 연정이 할머니가 서리태 콩을 털고 계셨다. 높이 쌓인 콩대를 하나씩 걷어내며 부지런히 콩을 털던 모습은 겨울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콩대 사이로 보이던 가을걷이에 분주한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이 문득 떠오른다. 우리 집 마당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겨울이 가까워지니 모든 잎을 떨구고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까치밥으로 남겨둔 붉은 감 하나만이 외롭게 매달려 있다. 그 앙상한 가지의 모습은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의 여윈 몸과도 같아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그 감나무는 40년 전 어머니께서 이웃 아주머니께 얻어와 애지중지 키우신 나무로 어느덧 마흔 해를 넘긴 귀한 생명이다. 생전에 어머니는 가을이면 주렁주렁 달린 감을 올려다보며 까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곤 하셨다. 감나무를 자식보다 더 귀하게 돌보시던 어머니는 수확 때면 하나하나 정성껏 따서 큰 고무 대야에 담고 깨끗한 천으로 닦아 홍시가 되기를 기다리셨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자식들에게 보내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었으리라. 이제 그 감나무는 우리 집의 보물 1호로 남아 있고 겨울이 올 때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달고 단 감맛이 애절한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12월이 되어 감나무의 앙상한 가지를 바라보면 이 해의 끝자락이 왔음을 실감한다. 성탄의 설렘과 제야의 종소리가 어우러지던 이 계절은 한 해를 돌아보고 삶을 성찰하던 시간이었고, 새로운 시작 또한 12월의 끝에서 맞이하곤 했다.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새해를 맞기 위해 온 국민이 동해·서해·남해로 떠나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던 시절도 떠오른다. 올해는 변혁과 지혜,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며 생명력과 성장을 나타내는 '을(乙)'과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동물인 '사(巳)'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을사년이었다. 또 한 해를 마무리하며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올 가을엔 유난히 비가 지루하게도 많이 내렸다. 비가 그친 뒤 파랗던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 시간이 부족했고 필레의 단풍나무조차 색동저고리로 갈아입을 여유가 없었다. 충분히 물들지 못한 산천초목을 바라보며 가을의 끝자락을 보낼 때면 그 아쉬움만이 마음 깊숙이 남는다. 12월, 내 생일이 있던 그 무렵이면 싸리나무와 잡목으로 만든 집 울타리 너머로 갈치 장수가 이른 아침 “갈치 사려, 갈치 사려!”를 외치며 마을을 지나갔다. 그 소리를 들으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서둘러 나가 갈치 한 손을 사서 생일 상으로 갈치 묵은지찜을 해주셨다. 그 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리움과 군침이 절로 고인다. 그것이 바로 12월의 맛,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문턱에서 맛볼 수 있었던 고향의 맛이다. 감나무 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을 때면 어머니의 손맛이 더욱 그립다. 겨울이 시작되면 한 해 동안 겪어온 단맛과 쓴맛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날이 차고 서리가 내리고 첫눈이 올 때면 어머니의 갈치 묵은지찜 맛이 더욱 간절해지고 그때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가리라 조용히 다짐하곤 한다.


